[바스켓코리아 = 편집부] KBL 2001-02 시즌을 씹어먹은 겁 없는 신인이 있었다. 주인공은 ‘매직핸드’ 김승현(36, 방송인)이다. 당시 김승현은 동국대를 졸업하고 신인 드래프트 3순위로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그리고 프로 데뷔 시즌에 놀라운 농구 센스를 앞세워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켰고, 결과로 KBL 사상 첫 신인 정규리그 MVP라는 역사를 만들었다. 최근 해설과 방송 출연 등으로 분주한 ‘일반인’ 김승현을 만나 보았다.▶ ‘즐거움’만 가득했던 ‘농구’라는 운동
김승현은 어릴 적부터 운동에 많은 재능이 가지고 있었고, ‘운동선수’로서 시작은 농구가 아닌 축구였다. 축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김승현은 5학년이 되면서 집이 인천 쪽으로 이사를 했고, 당시 다니던 학교가 너무 멀어 축구 선수를 그만 두었다. 매우 ‘쿨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전학을 오게 된 산곡북초등학교에는 농구부가 있었고, 당시 농구부 코치 선생님의 눈에 띄어 농구 선수로서 길을 밟게 되었다고 한다.
“제가 어릴 적부터 운동을 좀 잘했어요(웃음) 그 중에 축구가 제일 재미있었죠. 아버지도 운동 선수가 되는 걸 좋아하셨어요. 어머니는 반대하셨지만, 아버님과 제 뜻에 따라 운동을 하게 해주셨어요. 그래서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5학년 때 인천으로 이사를 갔어요. 이사를 가고 보니 축구부가 있던 전 학교까지 통학 거리가 너무 멀었어요.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멀리 다니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그냥 그만 두었죠.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근데, 제가 축구를 했으면 정말 잘 했을 것 같아요. 당시도 위 학년 형들에게 모두 이겼거든요(웃음) 아마도 이천수보다는 훨씬 잘했을 것 같아요”라며 앞으로 보여줄 ‘담백한’ 인터뷰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김승현은 ‘즐거움’과 함께 농구 선수로서 삶을 이어갔다. 농구공을 가지고 체육관에서 노는 게 정말 재미가 있었고, 중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면서도 ‘즐거움’을 모토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저 재미있는 운동이었죠. 저는 즐겁지 않으면 잘 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죠. 농구를 시작하면서부터 그저 재미와 함께 농구를 했던 것 같아요. 은퇴를 할 때까지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실력이 어느 정도 비슷하면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프로라고 생각하죠”
▶ ‘놀라운’ 농구 센스, 그리고 고(告) 전규삼 선생님
김승현이 학창 시절을 보낸 송도중고에는 대한민국 농구 코칭에 한 획을 그은 고(告) 전규삼 옹이 존재했다. 전규삼 옹은 다른 코치들과 달리 승패에 연연하기 보다는 앞으로 대한민국 농구를 짊어질 재목을 키우는 데 집중했던 코치로 잘 알려져 있다. 당장의 승패에 급급한 코칭보다는, 선수들이 향후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기본기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결과로 송도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프로에 입문한 선수들의 기본기만큼은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만에서 신사수(神射手)로 불렸던,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슛터 중 한 명인 이충희(전 창원 LG, 고양 오리온스, 원주 동부 감독)를 시작으로, 정덕화(전 안양 SBS스타즈, 청주 KB스타즈 감독), 강동희(전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 김승현 등 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했다.
“저는 중학교 때 전규삼 선생님에게 농구를 배웠는데, 정말 기본기를 중요시하는 스타일이셨어요. 3년 동안 드리블과 패스, 그리고 슛 기초에 대해 정말 자세히, 열심히 가르쳐 주셨어요.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철학을 주입시켜 주셨죠. 농구를 잘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 자유와 실력, 그리고 학창 시절의 방황(?)인터뷰를 이어가며 김승현에게 느낀 점은 담백함과 솔직함, 그리고 자유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던 중 ‘역시’라는 느낌이 드는 답변들을 내놓았다. 술과 가출에 관련한 이야기들이었다.
‘고등학교 때 가출을 했죠. 2학년 때 일인데요, 후배 2명이랑 셋이서 가출을 했어요. ‘서울 명동에 터를 마련하자’라는 생각으로 명동으로 향했죠. 인천 주안역 등에도 할 수 있었지만, 학교하고 가까워서 잡힐 수 있기 때문에 명동으로 갔죠(웃음) 그리고 호프 집에 취직했어요. 근데 그 호프집 사장님이 저희 신분을 조회했고, 부모님이 찾아와서 3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학교에 가서 엄청 맞았죠(웃음) 당시 고등학교 코치님이 강식선 선생님이셨는데, 정말 밧다로 많이 맞았어요. 잊혀지지 않을 정도였죠. 최근에 연락을 드렸는데, 폐암 말기로 고생을 하고 계셔요. 오래 못 사실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프더라고요”
대학 때 역시 다르지 않았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 성격 탓에 김승현은 훌륭한 농구 실력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세대나 고려대, 그리고 중앙대 같은 소위 말하는 농구 명문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김승현이 진학한 대학은 중위권으로 분류되는 동국대였다. 동국대에서도 김승현의 자유분방함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 때는 술만 먹으러 다녔던 것 같아요. 당시 1.2학년 때 최성오 감독님, 3,4학년 때 서대성 감독님이 계셨는데, 두 분 모두 저를 편하게 놔둬 주셨어요. 감사했죠. 게다가 최 감독님하고는 술도 많이 먹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정말 운동하는 것과 노는 걸 구분한다고 생각하는데, 두 분 모두 저하고 잘 맞는 스타일이었죠. 잘 놀아야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잘 한다고 생각해요”
프로에서도 김승현의 자유분방함은 멈추지 않았다. 김승현 신인 시절 오리온스는 양재동 교육문화회관(현 더 케이 호텔)을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일화가 있었다. 당시 신인들은 1년 정도 팀에 적응하는 기간을 가졌다. 2000년 10월 오리온스에 지명된 김승현은 1년 뒤인 2001-02 시즌부터 경기를 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인들은 모두 그랬다. 이 제도는 3년 전부터 바뀌었다. 선수에게 1년 간 공백은 치명적일 수 있다는 판단이 10년이 지나서야 적용되었다.
아무튼 1년 동안 프로에 적응하는 기간을 가졌던 김승현은 우연히(?) 무단 이탈이 사고를 경험했다.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을 숙소로 쓰고 있을 때였는데, 선수단이 모두 지방으로 시합을 갖죠. 그래서 (김)경석(현 천안 쌍용고 코치)이와 (이)두훈(현 서울 삼성 썬더스 전력 분석관)이와 함께 양재동에서 아는 친구, 누나들을 만나서 술을 진탕 먹었어요. 정말 많이 먹었죠. 그리고 친구 집에 가서 잤어요. 그리고 11시쯤 일어났는데, 전화 수십 통이 와 있더라고요. 팀이 올라와서 오전 운동을 하기로 했는데, 모르고 있었던 거죠. 당시 김진 감독님이 대행을 하고 계실 때였고, 지금 상무 이훈재 감독님이 주장을 맡고 있었죠. 당시 훈재 형님이 전화를 엄청 하셨더고라요. 조용히 ‘큰일 났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우나를 가서 술을 좀 깨고 점심시간에 맞춰 숙소에 들어갔죠”라며 김승현 본연의 흥미로운 ‘자유’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훈재형이 몇 말씀하셨고, 조금 있으니 감독님이 호출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감독실로 찾아 뵀더니, 그냥 ‘집에 가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를 드리고 짐을 싸서 집으로 갔어요. 그리고 한 달 정도 집에서 놀고 있었어요. 혼나는 거야 자주 겪긴 했는데, 그 때는 정말 가라고 하시는 것 같았어요(웃음) 오랜만에 노니까 정말 좋더라고요(웃음) 그렇게 한 달 정도 놀고 있는데, 감독님이 다시 전화를 하셨어요. ‘다시 들어와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팀에 합류했어요. 정말 열심히 했죠. 열심히 놀았으니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김승현은 ‘자유’를 중심으로 한 확실한 철학으로 인해 파란만장한 농구 선수의 인생을 경험했었다.
▶ ‘재미있었던’ 대학 생활, 그리고 신인 드래프트
김승현이 당시 대구 오리온스에 입단한 순위는 1라운드 3순위이다. 당시 마산고를 졸업하고 중앙대 에이스 역할을 했던 장신 포워드 송영진(37, 부산 케이티)과 그의 조력자였던 황진원(37, 은퇴), 그리고 양정고와 고려대 출신의 듀얼 가드 전형수(37, 인천 신한은행 코치) 등 좋은 자원들이 많았던 황금 드래프트였다. 당시 상황에서 전문가나 프로 팀 관계자들은 김승현이 1라운드 후반이나, 2라운드에 지명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김승현은 당당히 1라운드 3순위로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탁월한 농구 센스를 지니고 있었지만, 180cm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신장으로 두 명의 외국인 선수가 존재하는 프로에서 활약을 보여줄 지 의문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놀라움이었고, 당시 오리온스 사령탑이었던 김진 감독(현 창원 LG 감독)은 김승현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고, 모험 아닌 모험을 선택했던 것이다.
“1라운드 3순위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제가 비주류 대학 출신인데다, 실력도 월등하지 못했거든요. 시합에 나가도 맨날 지기만 했기 때문에 ‘프로에는 갈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죠. 그래서 2라운드에나 뽑히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죠. 4학년 때 대학 선발을 하긴 했지만, 프로 팀은 이전에 거의 선수를 점 찍는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당시 유재학 감독님이 SK 빅스(현 인천 전자랜드)를 맡고 계셨는데, ‘어쩌면 유 감독님이 선발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은 조금 했었어요. 어쨌든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냈고, 만약 뽑히지 못하면 ‘선생님을 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었죠. 체육교육과를 전공한 탓도 있겠지만,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적성에 맞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죠”라며 김승현은 자신의 드래프트 선발에 대한 부정적이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부정적인 느낌과 함께 참여한 드래프트에서 김승현은 당당히 1라운드 3순위로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3순위? 이거 머지? 라는 생각을 했죠. 정말 잘하는 선수들이 많은 데 내가 1라운드 3순위라고? 정말 놀랍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어쨌든 들어갔으니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 시절과는 달리(?) 정말 열심히, 부담 없이 운동을 했어요. 당시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켜준 사람이 지금 서울 SK에 있는 한대식 트레이너였는데, 스커트를 200kg까지 들게 하더라고요. 하지만 정말 군소리 하지 않고 열심히 따라했죠. 그래서 인지 정말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었어요. 근데 그 때 너무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나중에 허리에 탈이 나더라고요”라며 밝게 웃었다.
▶ 대담함, 노력, 센스가 합쳐졌던 ‘신인’ 김승현김승현 카드는 대 성공이었다. 당시 오리온스에는 김상우와 이흥수라는 포인트 가드가 존재했었다. KBL 소속 10개 구단 가드 진 중 가장 아쉬운 라인업이었다. 김진 감독은 1라운드 3순위와 함께 김승현을 1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조련했고, 결과는 초 대박이었다. ‘신인 최초 정규리그 MVP’라는 주제로 이번 호에 들어가는 이유가 되었을 정도의 대형 사고를 쳤던 김승현이었다.
김승현은 기존의 김병철, 전희철 토종 콤비에 마르커스 힉스와 라이언 페리맨이라는 확실한 색깔의 외국인 선수와 베스트 파이브를 이뤄 팀에게 첫 통합 우승을 안겼다. 이후 오리온스는 한 차례도 통합 우승을 기록한 적이 없다. 당시 김승현은 전력의 중심이었다. KBL 최고의 원투 펀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김승현과 힉스 조합을 만들어내며 KBL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김승현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강력한 스피드에 그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었고, 구장에 있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창조적인 패싱력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만들어냈다.
신인에게 쉽기 찾아볼 수 없는 대담함에 기인된 믿기 힘든 창조력이었다. 김승현이 만든 보기 힘든 장면들은 팬들이 조금씩 흥미를 잃어가고 있던 KBL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에 충분했고, 소속 팀인 오리온스 역시 확실한 인기 몰이를 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김승현은 그 대단한 패싱력에 레이업을 옵션으로 추가했고, 이듬해에는 3점슛까지 장착하며 리그에서 가장 막기 까다로운 포인트 가드로 거듭났다. 그리고 향후 7년 간 리그를 대표할 가드로 완전히 존재감을 알렸다.
“준비를 정말 많이 했죠. 전지훈련 동안 외국인 선수들과 호흡도 제대로 맞췄죠. 너무 재미있었죠. 대학 내내 지고만 살았는데, (김)병철이 형과 (전)희철이 형은 주는 족족 득점으로 연결했고, 힉스는 올려 놓기만 하면 어떻게든 알아서 득점을 하더라고요. 스타일 맞으니 정말 신나게 농구를 했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기량이 대등하다고 봤을 때 ‘신나게 하는 자를 넘어설 건 없구나’라는 철학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신인으로서 리그를 씹어먹던 김승현은 오리온스 역사상 첫 통합우승의 주연이 되었고, 신인 최초의 정규리그 MVP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5개 기록 부분에서 1위를 차지한 김승현은 당시 KBL을 대표하던 센터인 서장훈과 경합을 벌여 1표차로 MVP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열심히 하다 보니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정규리그 시상식 끝나고 ‘아, 이런 게 우승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보너스도 두둑하게 들어오죠, CF도 찍었죠, 이것뿐 만 아니라 정말 얻어지는 게 많더라고요. 게다가 상복도 터졌죠. 정말 흐뭇한 순간이었죠”라고 말했고, 서장훈과 경합했던 MVP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MVP가 발표되는 순간, 장훈이형 얼굴을 나도 모르게 쳐다봤어요. 정말 화난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저 역시 MVP는 당연히 장훈이형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받으니 얼떨떨하기도 했고요. 정말 놀랐던 순간이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김승현은 평균 7.96개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강동희(7.82개)를 물리치고 1위에 올랐고, 3.24개를 기록한 스틸 부분 역시 서울 SK 소속의 외국인 선수 에릭 마틴(2.33개)에 0.91개를 앞서며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신인상과 베스트 파이브, 김승현 커리어에 화룡점정을 찍은 MVP까지 아무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센터였던 서장훈이라고 하더라도 김승현을 넘어설 순 없었다. 당시 서장훈은 득점 3위(25.3점), 리바운드 16위(10개), 국내 리바운드 1위를 기록하며 외국인 선수들과 맞짱을 떴지만, 김승현의 센세이션에 뭍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 ‘승승장구’ 그리고 ‘위기’데뷔 후 승승장구하던 김승현은 7년 차에 접어들며 위기를 경험한다. 강렬한 데뷔 시즌을 보낸 김승현은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다. 대단한 영광이었다. 하지만 영광은 기적을 낳았다. 선배인 이상민에게 주전 포인트 가드 자리를 내주었던 김승현은 자신의 진가를 중국과 결승전에서 확실히 보여주었다.
4쿼터 후반 믿기 힘든 스틸 장면과 어시스트 등을 만들어내며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 가는 기폭제를 마련했고, 연장전에서 이상민 부재 속에도 침착함과 센스 넘치는 경기 운영을 선보이며 대한민국 남자 농구가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 만에 AG 금메달을 목을 거는 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활약이었다.
김승현 활약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남자농구는 은메달이라는 아쉬움과 조우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4쿼터 후반 보여준 두 개의 스틸은 대한민국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장면들이다. 그렇게 데뷔 시즌과 아시안 게임 활약에 힘입은 김승현은 이후 업그레이드라는 단어와 함께 매년 한 가지씩 기술을 더하며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선수로 성장했다. 이후 김승현은 3점슛과 플로터, 그리고 정확한 점퍼까지 자신에게 입혔다. 대한민국 최고 가드로 계속해서 성장하는 김승현이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김승현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과정이지만, 김승현에게 닥친 위기는 넘어서기 버거울 정도였다.
어느덧 프로 7년 차에 접어든 김승현에게 닥친 첫 번째 위기는 ‘부상’이었다. 허리 디스크라는 악령이 김승현에게 덮친 것. 김승현과 구단은 김승현 허리를 위해 많은 방법을 동원했다. 유일하게 쓰지 않은 방법이 수술이었다. 재활과 치료를 통해 허리를 살리려 했던 김승현에게 좋은 소식은 날아들지 않았다. 그리고 시즌을 맞이했다.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다. 게임에 빠지기 일쑤였고, 팀은 어느덧 연패를 탔다. 11연패… 12연패… 패배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김승현은 게임에 나섰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게임을 뛰었다. 제대로 된 기량이 나올 수 없었다.
구단과 괴리가 생겼다. 이면 계약 때문이었다. 김승현은 애초에 받기로 했던 돈을 받지 못했다. 언론에 알렸다. 파문이 일어났다. 존재 여부만 소문으로 돌았던 ‘이면 계약’이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승현과 오리온스는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했지만, 결국 합의를 하는 데 실패했고, 법정싸움으로 번졌다.
김승현은 1심에서 승소했다. ‘계약은 계약’이라는 결정을 내렸던 법원의 판결이었다. 하지만 김승현은 돈 대신 선수 생활 연장을 선택했다. 승소 이후 김승현은 “구단에서 조건 없이 나가게 해달라”라는 요구를 했다. 오리온스는 받아들였고, 서울 삼성으로 이적할 수 있었다.
▶ 새로운 시작, 그리고 ‘아듀! 플레이어’
김승현은 1년 동안 공방전을 끝내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적 첫해, 새롭게 부임한 김상준 감독과 합을 이룬 김승현은 아이라 클라크(울산 모비스), 이승준(원주 동부)과 함께 상큼한 출발을 보였다. 평균 26분 32초를 뛰면서 7.2점, 1.7리바운드, 5.1어시스트라는 준수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13승 41패를 기록하며 순위표 가장 아래에 머물고 말았다.
이후 삼성은 감독을 교체했다. 팀 감독 경험이 있던 김동광 전 감독을 새로운 사령탑으로 앉혔다. 팀은 22승 32패를 기록하며 6위에 올랐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김승현은 달랐다. 평균 13분 53초에 그쳤을 뿐이고, 평균 2점, 1리바운드, 2어시스트라는 평범함 이하의 성적을 남겼다. 허리 디스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 진 김승현에게 목 디스크가 찾아왔고, 자신의 스타일과는 차이가 나는 김 감독과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이유가 존재했다. KBL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김승현의 존재감이 온전히 사라지는 시즌이었고, 이후도 김승현은 평균 16분 정도를 코트에 나서면서 2.6점, 1리바운드, 2.5어시스트라는 평범한 성적과 함께 또 한 시즌을 정리했다.
고민이 많았다. “은퇴를 해야 하나? 명예 회복을 해야 하나?” 등 갈등이 심했다. 희망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김동광 감독이 사퇴하고 이상민 감독이 부임한다는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이상민 감독과는 선수 시절을 같이 했었기 때문에 훨씬 ‘편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구단이 김승현 은퇴를 포기했다. 삼성이 ‘계약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김승현은 “아쉬운 순간이었다. 삼성이면 몰라도 구단까지 옮기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 ‘은퇴하자, 그만두자’라는 결심을 했던 순간”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KBL 데뷔 이후 큰 바람과 함께 이정표가 되었던 ‘선수’ 김승현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 ‘일반인’ 김승현, 방송인과 ‘프로’ 낚시인은퇴 후 김승현은 자신의 성격처럼 ‘쿨’하게 11개월을 보냈다고 한다. 좋아하는 낚시와 골프를 실컷 즐겼고, 친분이 두터웠지만 많이 보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올 시즌이 임박해 친분이 두터웠던 서민교 MK스포츠 기자와 함께 아프리카 TV를 통해 농구 중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올 시즌부터 새롭게 KBL 중계를 하고 있는 SKY스포츠 해설도 하고 있다.
“시즌 전에 우연히 지인을 통해 ‘아프리카 TV 중계를 같이 해보자’라는 제안을 받았죠. 재미 있을 것 같았어요. 잡담이나 뒷담화 같은 것도 할 수 있고, 조금 진한 에피소드도 할 수 있다는 부분이 매력적이었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재미있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시즌 중반에 SKY스포츠에서도 해설을 하게 되었죠. 아프리카 TV하고 전혀 다르지만,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이것도 다른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단했던 선수 생활을 접고 초보 일반인으로 삶을 살고 있는 김승현과 인터뷰는 마무리되었다. 빼먹은 질문이 있었다. 바로 ‘결혼’과 관련된 질문이었다.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어요. 2년 안에 결혼할 생각이죠”라고 바로 답변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 있는 상황과 나이였다.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의 키워드는 ‘솔직, 담백’이었다. ‘자연인’으로 새 삶을 살고 있는 김승현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길 기대해 본다.
글 = 김우석 기자, 사진 = 이솔 기자
[이 기사는 농구 전문 잡지로 2015년 1월 새롭게 창간한 더 바스켓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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