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1월 13일(이하 한국시간) NBA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지난 1960년 이날에는 ‘The Human Highlight Film’ 도미니크 윌킨스(포워드, 203cm, 102kg)가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윌킨스의 아버지는 미 공군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유년기를 프랑스에서 보낸 그는 이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지난 2006년에는 ‘아시아 챌린지’에 나서기 위해 레전드팀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바 있다.
윌킨스는 고교시절부터 많은 이목을 집중시킨 선수였다. 윌킨스는 1경기에서 무려 48점 27리바운드 8블락을 기록하면서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이날 덩크도 9개나 터트리는 등 어릴 적부터 숱한 하이라이트를 만들 떡잎으로 평가됐다. 윌킨스는 ‘맥도널드 올-아메리칸 게임’에 나선 것도 모자라, ‘맥도널드 올-아메리칸’이 선정하는 위대한 35인에서 이름을 새겨 넣었을 정도였다. 이를 시작으로 ‘캐피털 클래식(The Capital Classic)’을 비롯하여 여러 굵직굵직한 경기에 나서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윌킨스의 NBA 데뷔!
그랬던 그는 지난 1982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진출했다. 윌킨스를 지명한 팀은 다름 아닌 유타 재즈. 유타는 1라운드 3순위로 윌킨스를 지명했다. 그러나 유타는 시즌 개막 전 윌킨스를 트레이드했다. 윌킨스는 유타에서 뛰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유타는 하는 수 없이 윌킨스를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유타는 윌킨스를 보내는 조건으로 존 드류와 프리먼 윌리엄스 그리고 현금을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이 트레이드는 철저히 한 쪽으로 치우친 트레이드로 남아 있다.
# 윌킨스 트레이드 1
애틀랜타 get 도미니크 윌킨스
유타재즈 get 존 드류, 프리먼 윌리엄스, 현금
애틀랜타는 손대지 않고 코를 풀었다. 윌킨스를 영입하면서 단숨에 동부컨퍼런스를 대표하는 강호로 떠올랐다. 윌킨스는 데뷔하자마자 코트를 수놓았다. 첫 시즌은 지난 1982-1983 시즌에 모든 경기에 나선 그는 경기당 32.9분을 소화하며 17.5점 5.8리바운드 1.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후 윌킨스는 2년차부터 자신의 평균 득점을 20점대로 끌어올렸고, 지난 1984-1985 시즌부터는 평균 27.4점을 올리면서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발돋움했다. 이후 윌킨스는 지난 1993-1994 시즌까지 꾸준히 평균 26점을 올렸다(90-91 시즌은 평균 25.9점).
이 뿐만이 아니다. 이듬해인 지난 1985-1986 시즌에는 평균 30점 이상을 득점했다. 프로에 발을 들인 이후 꾸준히 평균 득점을 끌어올린 그는 평균 30.3점을 올렸다. 지난 1986년부터는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남다른 한 시즌을 보냈다. 이후 윌킨스는 지난 1994년까지 9년 연속 올스타로 자리매김하면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수놓았다. 득점만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스몰포워드로 리바운드 단속에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2번째 시즌에 평균 7.2리바운드를 잡아낸 것을 시작으로 지난 1990-1991 시즌에는 평균 9리바운드를 잡아내는 기염을 토해냈다. 윌킨스는 해마다 6리바운드 이상을 책임졌다.
엄청났던 전성기&잘 풀리지 않았던윌킨스의 우승반지사냥
윌킨스가 애틀랜타를 이끌 당시 동부에는 래리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와 줄리어스 어빙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가 있었다. 흡사 현재 르브론 제임스(클리블랜드), 폴 조지(인디애나), 카멜로 앤써니(뉴욕)가 동부를 주도하는 형국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플레이오프에서 그만큼 상대해야 되는 팀들의 수준이 높았다는 뜻이다. 윌킨스는 팀을 꾸준히 플레이오프로 견인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지난 1998 플레이오프는 윌킨스에게 두고두고 아쉬운 일전이었다. 윌킨스는 버드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시리즈를 최종전까지 몰고 갔지만, 끝내 윌킨스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애틀랜타는 적지에서 첫 2경기를 내줬지만, 안방에서 이를 만회하는데 성공했다. 뒤이어 보스턴 원정에서 열린 5차전에서 112-104로 승리를 거뒀다.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에 단 1승만을 남겨놓았다. 하지만 애틀랜타는 6차전에서 102-100으로 패한데 이어 7차전에서도 118-116으로 지고 말았다. 애틀랜타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6차전의 패배도 아쉽지만, 7차전에서도 단 2점차로 석패하면서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이 시리즈에서 윌킨스는 7경기 평균 38.4분을 뛰면서 31.3점 5.4리바운드 2.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야말로 혼자서 팀을 끌고 올라갔다. 닥 리버스(현 클리퍼스 감독)와 케빈 윌리스가 포진하고 있었지만, 보스턴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보스턴에는 버드 외에도 케빈 맥헤일, 로버트 패리쉬, 데니 에인지, 데니스 존슨 등 당대를 수놓은 걸출한 스타들이 즐비했다. 이런 강팀을 상대로 애틀랜타는 보스턴을 탈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 오히려 시리즈를 접수할 뻔 했다. 아직도 명승부로 회자되는 1988년 벌어졌던 동부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애틀랜타가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윌킨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이후 윌킨스는 좀체 우승과 연을 맺지 못했다. 우승은커녕 상위 라운드 진출을 모색하기도 쉽지 않았다. 정규시즌에서는 통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결코 쉽지 않았다. 상대도 윌킨스를 막거나 혹은 나머지 선수들을 틀어막으면 그만이었다. 윌킨스의 애틀랜타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윌킨스는 팀에서 꾸준하게 기여했지만, 정작 애틀랜타는 1라운드도 뚫어내지 못했다. 이후 1989년과 1991년에도 봄나들이에 나섰지만, 애틀랜타는 5차전(당시 최종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모두 백기를 들어야 했다.
애틀랜타가 플레이오프 많이 올랐던 만큼 드래프트에서 많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는 이적시장도 마찬가지. 애틀랜타는 윌킨스를 보좌해 줄만한 스타선수를 영입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애틀랜타는 지난 1993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단 3경기 만에 짐을 싸야 했다. 상대는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였다. 윌킨스가 뛸 당시 80년대 중반에는 보스턴, 80년대 후반에는 아이제아 토마스와 조 듀마스가 이끄는 디트로이트 피스턴스, 90년대 초반에는 조던의 시카고가 연거푸 우승을 차지했다. 이 기간 동안 윌킨스는 철저한 ‘2인자’에 머물러야 했다.
애틀랜타는 변화를 모색하기로 했다. 지난 1993-1994 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LA 클리퍼스와 트레이드에 합의했다. 이 트레이드의 화두는 윌킨스였다. 애틀랜타는 프랜차이즈스타를 헌신짝 버리듯이 반대편 서부로 보내버렸다. 애틀랜타는 윌킨스에다 1994 1라운드 티켓까지 보냈다. 파격적인 트레이드였다. 애틀랜타가 받은 선수는 데니 매닝이 전부였다. 프랜차이즈를 이끌었던 선수를 만기계약을 활용해 처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1라운드 지명권까지 보냈을 정도. 윌킨스는 12시즌 넘게 애틀랜타에서 뛰었지만, 돌아온 것은 트레이드였다.
# 윌킨스 트레이드 2
클리퍼스 get 도미니크 윌킨스, 1994 1라운드 티켓
애틀랜타 get 데니 매닝
윌킨스는 드래프트 이후 유타에서 뛰길 원치 않았고, 애틀랜타에 둥지를 텄다. 공교롭게도 이는 13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애틀랜타가 윌킨스와 함께 하길 원치 않았다. 자신이 13년 전에 했던 일을 그대로 당한 셈이다. 이후 윌킨스는 클리퍼스에서 남은 시즌을 마무리했다. 윌킨스는 이적시장에서 새로운 팀을 택해야 했고, 그 팀은 공교롭게도 자신의 앞길을 여러 차례 가로 막았던 보스턴이었다. 윌킨스는 보스턴에서 평균 17.8점을 득점하며 팀에 기여했다. 보스턴은 가까스로 8번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샤킬 오닐과 앤퍼니 하더웨이가 이끄는 올랜도 매직. 올랜도는 이 때 동부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하며 파이널에 진출했다.
선수생활 막바지, 엇갈렸던 슈퍼스타들과의 조합
보스턴과의 1년 계약을 끝으로 윌킨스는 그리스리그에서 1시즌을 치렀다. 이 때 윌킨스는 프로 데뷔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윌킨스가 속했던 파나시아코스는 유로리그 파이널포에 진출했고, 결승에 올라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와 맞섰다. 단판경기에서 윌킨스는 이날 맹활약했다. 불혹을 앞둔 윌킨스는 준결승에서 가장 많은 35점을 퍼부으며 팀의 결승행에 이바지했다. 결승에서는 비록 16점에 그쳤지만 10리바운드를 보태며 더블더블을 작성했고, 팀의 1점차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윌킨스는 지난 1996 유로리그 파이널포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NBA에서 맛보지 못한 우승과 MVP를 유럽에서 품을 수 있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계약했다. 샌안토니오에서 데이비드 로빈슨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로빈슨과 윌킨스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당시 샌안토니오는 어수선했다. 시즌 첫 18경기에서 샌안토니오는 단 3승에 그쳤다. 샌안토니오는 밥 힐 감독 대신 그렉 포포비치 어시스턴트 코치로 하여금 팀을 이끌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로빈슨은 부상으로 31경기를 나서는데 그쳤다. 에이브리 존슨(전 브루클린 감독)과 비니 델 네그로(전 클리퍼스 감독) 그리고 버넌 맥스웰이 윌킨스와 함께 동분서주했지만,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샌안토니오는 지난 1997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갖게 됐다. 샌안토니오가 호명한 선수는 팀 던컨이었다.
윌킨스는 다시 유럽으로 복귀(?)했다. 이탈리아리그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 1998년 여름 올랜도와 계약했다. 올랜도에는 그의 동생인 제럴드 윌킨스가 있었다. 하지만 올랜도에는 이미 오닐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오닐은 지난 1998년 여름 LA 레이커스에 새둥지를 틀었다. 오닐은 레이커스와 계약기간 7년에 1억 2,1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하며 할리우드로 떠났다. 결국 윌킨스는 오닐과도 함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윌킨스는 이 때 많은 경기를 나서지 못했다. 윌킨스는 27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다. 평균 5점 2.6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윌킨스는 가는 곳마다 여기저기서 강팀들에 짓밟힌 선수생활을 했다. 버드와 토마스가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윌킨스는 먼발치서 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들어서는 조던에게 가로막혔다. 이후 애틀랜타로부터 버림을 받은 이후 샌안토니오에서 로빈슨과 함께했지만 그와 많은 시간을 코트에서 보내지 못했다. 윌킨스가 떠난 이후 던컨이 들어왔고, 올랜도에서는 오닐이 팀에 잔류하지 않음으로 호흡을 맞출 수 없었다. 이처럼 윌킨스가 달려온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윌킨스는 자신의 전성기를 보낸 와중에 다른 스타들과 힘을 합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아직도 애틀랜타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은 선수로 남아 있다. 그의 21번은 현재 애틀랜타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시에 그는 NBA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어 있다.
Side Story_ 쉽지 않은 덩크 컨테스트 우승 탈환기!
윌킨스는 올스타 전야제로 열리는 덩크 컨테스트에서도 우승을 거두기 쉽지 않았다. 지난 1984년에는 래리 낸스와 어빙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윌킨스는 3점 차로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이듬해 조던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고, 지난 1986년에는 팀동료인 스퍼드 웹과 결승에서 조우했지만, 단 2점차로 석패했다. 지난 1988년에는 조던과 자웅을 겨뤘지만 이번에도 2점차로 우승을 넘겨줘야 했다. 하지만 윌킨스는 지난 1990년에 케니 스미스, 케니 워커, 스카티 피펜, 션 켐프를 따돌리고 2번째 우승을 수확했다.
# 윌킨스의 수상경력
올스타 9회(1986~1994)
올-NBA팀 7회(퍼스트팀 1회, 세컨드팀 4회, 서드팀 2회)
루키 퍼스트팀(1983)
득점 1위(1986)
덩크 컨테스트 우승(1985, 1990)
애틀랜타 영구결번(21번)
유로리그 우승(1996)
유로리그 파이널포 MVP(1996)
사진 = Google.com Cap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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