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승 칼럼] 우승 반지를 낚은 남자 '낚시왕' 데릭 피셔의 18시즌을 돌아보며 (2)

Jason / 기사승인 : 2014-08-28 10: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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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ek Fisher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D-Fish' 데릭 피셔가 18시즌을 수놓았던 NBA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피셔는 지난 6월 11일(이하 한국시간) 뉴욕 닉스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선수로서의 은퇴를 고했다. 피셔는 스타급 선수는 아니었지만, 팀이 필요할 때마다 제 몫을 다하면서 개인통산 다섯 차례 우승을 거두는 등 남부럽지 않은 선수시절을 보냈다.

지난 1996 드래프트에서 피셔는 LA 레이커스의 지명을 받으면서 NBA 무대에 발을 들였다. 1996 드래프트는 앨런 아이버슨(1순위), 레이 앨런(5순위), 코비 브라이언트(13순위), 스티브 내쉬(15순위) 등 여러 슈퍼스타들이 지명된 드래프트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와중에 피셔의 이름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샤킬 오닐, 브라이언트를 시작으로 케빈 듀랜트까지 여러 슈퍼스타들과 함께 뛰는 행운까지 누렸다. 특히 레이커스 시절에는 브라이언트와 함께 모든 우승을 합작하면서 브라이언트와 좋은 호흡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피셔는 지난 2006년에 선수협회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그 역할까지도 잘 수행했다. 특히 지난 2011년에는 2005년에 체결한 CBA(Collective Bargain Agreement)가 만료되면서 직장폐쇄(Lockout)를 맞이하기도 했다.

피셔는 직장폐쇄 와중에도 선수협회장으로서 선수협회 이사인 빌리 헌터와 함께 선수들의 권익을 주장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직장폐쇄가 길어지면서 'NBA 직장폐쇄가 길어지는 것이 피셔 때문'이라는 오명을 덮어쓰기도 했지만, 피셔는 선수들의 이권을 포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선수시절 대부분은 레이커스에서 보냈다. 특히 지난 2011-2012 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휴스턴 로케츠로 트레이드되면서 여러 팀들을 떠돌기도 했다. 피셔는 휴스턴 로케츠를 시작으로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뛰었으며, 오클라호마시티에서 길었던 그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피셔의 길고 길었던 18시즌 간의 대장정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봤다.

목차

1. 1996-2004 레이커스에서 함께한 3연패의 대업

2. 2004-2014 이적, 이후 친정으로의 복귀 그리고 마지막

프로필

1996 드래프트 1라운드 24순위, LA 레이커스에 지명

1996-2004 레이커스

2004-2006 워리어스

2006-2007 유타재즈

2007-2011 레이커스

2011-2012 레이커스, 로케츠, 썬더

2012-2013 매버릭스, 썬더

2013-2014 썬더

*우승 5회, 슈팅스타 챔피언(2004)

2004-2007 자유계약선수, 새로운 팀에서

2004년 7월 16일, 피셔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계약기간 6년에 3,70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다. 피셔는 생애 첫 비제한 자유계약선수로서 장기계약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우려의 시선이 만만치 않았다. 주전급가드에게 2, 3년 장기계약도 아닌 무려 6년 계약을 제시한 것이 잘못된 계약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더불어 오닐과 브라이언트의 슈퍼스타후광을 벗어나서 피셔가 골든스테이트에서 레이커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활약할 지조차 미지수였다. 피셔가 직접 두터운 수비벽을 마주한다고 봤을 때, 부정적인 시선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피셔는 무난한 시즌을 보냈다. 피셔는 두 차례나 6경기 연속 두 자리 수 득점을 올리는 등 평균 11.9점을 올렸다.

당시 골든스테이트는 배런 데이비스와 제이슨 리차드슨이 주축으로 스피디 클렉스턴까지 백코트쪽의 전력은 괜찮은 팀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서의 전력은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다. 골든스테이트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는 것은 당연했다. 피셔는 레이커스에서 줄곧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정작 골든스테이트에서는 플레이오프를 내다볼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이듬해인 2005-2006 시즌, 피셔는 모든 경기에 나서 평균 생애최다인 13.3점을 기록했다. 피셔가 82경기에 모두 나선 것은 지난 1997-1998 시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피셔는 이 시즌을 기점으로 향후 여섯 시즌동안 단 한 경기도 거르지 않고 모두 시즌 전경기를 소화하면서 강철체력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시즌이 끝난 2006년 여름, 피셔는 아쉽게도 트레이드되기에 이른다. 데뷔 이후 10년 만에 첫 트레이드를 겪게 된 피셔는 유타에서 새로운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유타는 피셔를 데려오는 대가로 데빈 브라운, 키스 맥러드, 안드레 오웬스를 건넸다. 유타가 무려 세 명이나 주고 피셔를 데려온 것은 가드 진영의 보강이었다.

그 때 당시 유타는 데런 윌리엄스를 제외하고는 마땅한 가드가 없었다. 메멧 오쿠어, 카를로스 부저, 안드레이 키릴렌코가 지키고 있는 프런트코트 진영은 서부 최고 수준이었지만, 정작 슈팅가드 자리가 늘 구멍이었다. 벤치에서 나서는 맷 하프링이 간헐적으로 가드로 나서긴 했지만, 하프링은 엄연히 포워드로 윌리엄스의 볼핸들링 부담을 좀체 덜어주지 못했다.

결국 유타의 제리 슬로언 감독은 피셔를 통해 윌리엄스의 부담을 줄여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피셔는 유타에서 무려 62경기에서 주전으로 나섰다. 이는 윌리엄스의 파트너, 다시 말해 슈팅가드로 대부분의 시즌을 소화했다는 뜻이다. 피셔에게도 호재였다. 레이커스 이후에 모처럼 플레이오프 이상을 노릴 수 있는 팀에서 뛰게 됐기 때문. 피셔는 윌리엄스 곁에서 평균 10.1점 3.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보다 놀라운 것은 더블더블을 40차례나 작성했다는 것이다.

피셔는 11월에 선수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전임회장인 앤토니오 데이비스의 뒤를 이어 선수협회를 이끌게 됐다. 그 전부터 부회장을 맡으며 선수들의 이권을 대변하는데 힘써온 피셔였기에 큰 무리 없이 회장직을 수행할 것으로 여겨졌다.

2007 플레이오프에서 피셔는 또 한 번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만한 일을 겪게 된다. 일단 유타는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와 야오 밍이 이끄는 휴스턴 로케츠를 맞아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를 거뒀다. 유타는 맥그레이디와 야오 밍 그리고 쉐인 베티에에게 '1라운드 징크스'를 선사하며 2라운드에 올랐다.

당시 유타의 2라운드 상대는 피셔의 전소속팀이었던 골든스테이트. 골든스테이트는 1라운드에서 탑시드인 댈러스를 제압하는 대이변을 만들어냈다. 당시 골든스테이트가 내뿜은 기세는 실로 엄청났다. 하지만 그 덕에 유타는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안은 채 서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 때 피셔의 자녀 중 한 명이 아프게 됐고, 급기야 피셔는 가족의 곁에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피셔는 결국 슬로언 감독에게 양해를 구했고, 자리를 비웠다. 1차전을 승리한 유타는 2차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윌리엄스는 파울트러블에 빠져 있었고, 백업가드인 디 브라운은 부상으로 출전이 불투명했다. 급기야 키릴렌코가 경기를 조율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야말로 피셔가 필요했을 때였다. 하지만 그 때 피셔가 의사의 허락을 맡고 뉴욕에서 유타의 솔트레이크시티까지 날아왔다. 피셔는 도착하자마자 에너지솔루션아레나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피셔는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경기장으로 들어왔고, 피셔는 벤치에 앉을 새도 없이 곧바로 경기에 투입됐다.

피셔는 3쿼터 중반부터 코트를 밟았고, 4쿼터에 결정적인 수비로 데이비스를 막아내면서 경기가 연장으로 가는데 일조했다. 결국 이날의 승리팀은 유타였다. 안방에서 2경기를 내리 잡아낸 유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원정길에 오르게 됐다. 피셔의 복귀는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여러 사정으로 팀내 가드가 없는 상황에서 제일 필요할 때 모습을 드러내며 팀을 위기의 수렁에서 구해냈기 때문이다.

골든스테이트를 4대 1로 제압한 유타는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샌안토니오를 만나게 된다. 유타는 샌안토니오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3차전에서 26점차 승리를 거둔 것은 좋았지만, 이후 승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아쉽게도 파이널 문턱에서 돌아가는 짐을 꾸려야만 했다. 시즌이 끝난 뒤, 피셔는 유타 구단에게 자신을 방출해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했다. 아직 3년에 2,200만 달러의 계약이 남아있음에도 피셔는 딸의 치료 탓에 유타에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07-2012 레이커스의 우승청부사

피셔가 선택한 곳은 레이커스였다. LA에 있다면, 딸의 치료와 본인의 선수생활을 병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피셔가 레이커스와 체결한 계약은 3년에 1,400만 달러. 유타에 남아 있었다면, 800만 달러를 더 챙겼겠지만 피셔는 돈보다 딸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치료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피셔는 2004년 이후 처음으로 레이커스의 일원으로 거듭났다. 주전자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레이커스도 잭슨 감독을 새로 앉히며 또 다른 우승을 위해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앞두고 레이커스가 멤피스 그리즐리스로부터 '스페인 특급' 파우 가솔을 전격 영입했다. 레이커스는 가솔의 합류로 일약 서부 최고의 우승후보로 올라섰다.

피셔는 2007-2008 시즌에 40%가 넘는 3점슛 성공률과 생애최다인 88%의 자유투 성공률을 선보였다.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피셔와 레이커스는 또 샌안토니오를 만났다. 피셔는 4차전에서 브렌트 베리의 공격을 저지하며 팀이 2004년 이후 첫 서부 컨퍼런스 우승을 차지하며 파이널에 올랐다.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은 피셔가 샌안토니오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다시금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파이널에서의 상대는 BIG3가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 레이커스는 선전했지만, 끝내 대세를 뒤집지 못하며 패하고 말았다. 피셔는 생애 두 번째 파이널에서 패배를 당했다. 지난 2002년 이후 모처럼 잡은 우승의 기회를 또 놓친 셈이다. 하지만 2008-2009 시즌에는 레이커스가 대망의 우승을 거머쥔다.

시즌 내 전반적인 기록은 이전 시즌만 못했지만, 파이널에서만큼은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피셔는 파이널에서의 5경기 중 3경기에서 두 자리 수 득점을 올리면서 브라이언트와 가솔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백미는 4차전이었다. 피셔는 31.3초를 남겨두고 결정적인 3점슛을 쏘아 올렸다.

피셔의 슛이 림을 관통하면서 레이커스는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 갔고 연장전에서 승리의 쐐기를 박았다. 만약 레이커스가 4차전을 패했다면, 시리즈가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법이었을 터. 그러나 4차전을 잡으면서 3승을 먼저 선취한 레이커스가 끝내 5차전까지 연거푸 잡아내며 구단 역사상 15번째 우승배너를 걸게 됐다.

2010년 2월 4일 샬럿 밥캐츠와의 경기에서 피셔는 시즌 통산 1,000번째 3점슛을 성공시켰다. 이어진 11일 유타와의 경기에서는 시즌 1,000번째 경기를 출장하는 감격을 누렸다. 24일 멤피스전에서는 9,000점을 넘어서는 기염을 토해냈다. 시즌 때 연거푸 개인기록의 문턱을 넘어선 피셔는 플레이오프에서 단일 플레이오프에서 가장 많은 23경기를 소화했다. 3점슛 성공률도 예전처럼 돌아온 모습이었다.

그러나 파이널에서는 정작 피셔의 3점슛이 침묵을 거듭했다. 공교롭게도 맞상대인 보스턴의 레이 앨런이 침묵을 거듭하는 와중이었던 것일까? 레이커스는 어렵사리 승부를 장기전으로 몰고 갔다.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는 레이커스였기에 안방에서 반전을 노릴 여지는 없지 않았다. 6차전에서 레이커스는 상대 주전 센터인 켄드릭 퍼킨스가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면서 기회를 잡았다.

6차전에서 대승을 거둔 레이커스는 마지막 7차전에서 보스턴에 83-79, 진땀승을 거뒀다. 시리즈 내내 침묵하던 피셔는 이날 3점슛 2개가 림을 가르며 힘을 보탰다. 브라이언트의 공격이 원만하지 않은 가운데 터진 3점슛이었기에 레이커스에겐 가뭄의 단비만큼이나 귀한 득점이었다. 론 아테스트(현 팬더프렌즈)의 활약도 단연 돋보였다. 아테스트는 브라이언트의 영점이 흔들린 와중에 20점을 몰아넣으며 7차전 승리를 이끌었다.

2연패에 성공한 레이커스는 피셔와 계약기간 3년에 1,050만 달러의 계약을 체결했다. 마지막 해에는 선수옵션까지 삽입되어 있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2010-2011 시즌은 잭슨 감독이 은퇴를 하기로 한 시즌이었다. 레이커스는 2라운드에서 댈러스에 스윕을 당했다. 피셔도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기량이 아니었다.

단순 기록만 보더라도 그랬다. 피셔는 레이커스 합류 이후 평균 득점(11.7→9.9→7.5→6.8)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레이커스도 우승에 실패하면서 피셔를 트레이드하게 된다. 레이커스는 2011-2012 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고 피셔를 휴스턴으로 트레이드했다.

2012-2014 마지막을 향해가고 있는 피셔의 선수생활

지난 첫 8시즌은 피셔가 자유계약선수로 팀을 나온 것이라면 이후 5시즌은 흐르는 세월을 거스르지 못하고 트레이드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게다가 3월 20일에는 처음으로 방출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피셔는 곧바로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에 합류한다. 피셔는 오클라호마시티에서 그간 달아 온 2번을 대신해 37번을 달게 된다. 2번은 이미 타보 세폴로샤가 달고 있었기에 피셔는 당시 37살이라 37번을 택했다.

더 이상 주전은 아니었지만, 피셔가 그간 겪은 경험은 젊은 선수들이 즐비한 오클라호마시티 선수들에게 적잖은 자양분이 됐다. 피셔는 라커룸리더로서 선수들에게 의지를 복돋우는 등 '보컬 리더'로서 오클라호마시티에서 역할을 다했다. 피셔는 오클라호마시티 유니폼을 입고 한 번 파이널을 노크하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우승은 허락되지 않았다. 피셔는 코트 위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기록된 실책은 없었지만, 발이 느려지다보니 상대 가드에게 실점을 헌납하기 일쑤였다. 코트마진에서도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시즌이 끝난 뒤 피셔는 여름을 그냥 보내게 된다. 이후 11월 30일에서야 댈러스와 계약을 맺었다.

피셔는 6번째 우승을 위해 6번을 달고 코트를 누빈다. 하지만 12월 21일에 무릎 부상을 당했고, 회복하는데 2주가 소요됐다. 커리어의 끝자락에 당한 부상이었기에 피셔에게도 충격이었다. 결국 피셔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댈러스에 방출을 요청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월 26일 피셔는 오클라호마시티로 복귀한다. 피셔는 백업가드인 에릭 메이너에 이어 팀내 세 번째 포인트가드 역할을 소화하게 됐다.

대망의 2013-2014 시즌, 피셔는 다시금 6번을 달고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냈다. 경기당 5.3점을 올린 피셔는 데뷔 시즌을 제외하고는 가장 늦은 득점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날 무렵 피셔가 은퇴할 것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나이가 많았던 것도 있지만, 스승인 필 잭슨이 뉴욕 닉스의 사장에 자리했기 때문에 피셔를 감독으로 선임할 거시아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결국, 피셔는 미련 없이 현역생활을 마무리하고 뉴욕의 감독으로서 제 2의 농구인생을 열게 됐다. 피셔는 뉴욕과 계약기간 5년에 2,500만 달러에 뉴욕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선수시절 남다른 리더십을 보여 왔던 피셔이기에 감독으로서도 선수들을 잘 통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피셔는 플레이오프에서 무려 259경기에 나섰고, 161승을 거두었다. 뉴욕의 잭슨 사정은 피셔를 두고 "레이커스에서의 완전한 대변인이었다"면서 피셔가 리더십을 잘 발휘해줬음에 대해 칭찬했다. 그와 함께 모든 챔피언십을 합작했던 브라이언트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팀메이트로 거론했다. 지난 2013-2014 시즌, 생애 첫 MVP를 차지한 케빈 듀랜트는 피셔를 두고 '최고의 리더'라며 피셔가 필요 이상의 비난과 마주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No.2 데릭 피셔. 통산 다섯 차례 우승, 0.4초 버저비터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그의 18시즌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사진 = Derek Fisher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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