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2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KBL에서 많은 트리플더블을 신고한 선수는 많았다. 그 중에서도 앨버트 화이트, 크리스 윌리엄스, 데릴 먼로가 대표적이다. 이 중 화이트와 윌리엄스가 단연 돋보였으나 이들 이전에 국내 무대에서 트리플더블을 꾸준히 엮어낸 이가 있다. 바로 안양 SBS(현 KGC인삼공사)와 원주 TG(현 DB)에서 뛰었던 리온 데릭스다. 데릭스는 미국에서는 포워드로 뛰었으나, 국내에서는 센터로 뛰면서 각 팀의 안쪽 전력을 다지는 데 일조했다. 우승 경험도 있는 그는 트리플더블을 여러 차례 엮어내며 다재다능함의 대명사로 손꼽히기도 했다.
대학 시절
어린 시절 데릭스는 미시건주를 대표하는 유망주였다. 미국에는 예나 지금이나 각 주에서 대표적인 유망주가 되는 것도 상당히 어렵다. 많은 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으며, 주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데릭스는 그 중 농구 명문 대학이 많은 미시건에서도 빠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미시건에는 NBA 진출은 물론 NCAA에서 꾸준히 많은 족적을 남긴 선수가 많았던 만큼, 미시건에서 이름이 언급이 되는 것만 하더라도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데릭스는 주에서 이름을 알 만한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주 최고 명문이자 전미에서도 손꼽히는 학교이자 빅10컨퍼런스의 미시건대학교에 진학했다. 미시건 울버린스에는 이미 크리스 웨버와 주완 하워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웨버를 필두로 당시 미시건을 대표하는 선수는 ‘Fab Five’로 불리면서 전미를 대표하는 팀으로 거듭났다. ‘Fab Five’에는 웨버 외에도 하워드, 제일런 로즈, 지미 킹, 레이 잭슨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중 웨버가 NBA 올스타로 거듭났고, 하워드와 로즈도 NBA에 진출했으며, 잭슨도 손꼽히는 선수였다. 당시 Fab Five가 많은 관심을 모은 것은 모두 1학년이었기 때문. 특히 챔피언십게임에서 주전 선수 전원이 신입생으로 꾸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이들이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했다.
데릭스는 지난 1992-1993 시즌부터 NCAA에서 뛰었다. 그러나 같은 포지션에 웨버가 포진하고 있어 그가 뛰긴 어려웠다. 14경기에서 나섰으나 4.4분을 뛴 것이 전부였으며, 평균 기록도 0.8점(필드골 성공률: 28.6%, 3점슛 성공률: 0%, 자유투 성공률: 42.9%) 1.3어시스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웨버가 시즌 후 NBA에 진출하면서 데릭스가 조금씩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하워드가 버티고 있었기에 데릭스는 주로 벤치에서 나서야 했다. 이전 시즌 대비 출전 시간을 비롯한 각종 기록은 나아졌으나 여전히 많은 역할을 맡는 것은 어려웠다. 지난 1993-1994 시즌에는 30경기에서 평균 11.1분을 소화하며 2.3점(필드골 성공률: 41.9%,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53.3%) 2.2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당시 미시건은 24승 8패로 컨퍼런스 2위에 오르면서 위력을 떨쳤다. 로즈가 중심을 잘 잡으면서 여전히 강한 면모를 뽐냈다. 그러나 데릭스가 선수로 많이 뛰긴 여전히 어려웠다. 웨버의 프로 진출로 기회를 얻긴 했지만 제한적이었다.
결국, 그는 전학을 택했다. KBL과 인연을 맺었던 많은 선수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했으나 정작 출전 기회를 많이 잡지 못한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였다. 전학을 할 경우 한 시즌을 뛸 수 없음에도 그는 학교를 옮겼다. 그는 MC(Midwestern Collegiate)컨퍼런스의 디트로이트 타이탄스로 건너갔다. 그는 곧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 1995-1996 시즌 29경기에 나선 가운데 27경기를 주전으로 뛰었다. 경기당 31.1분 동안 10.6점(필드골 성공률: 44.9%, 3점슛 성공률: 0%, 자유투 성공률: 65.1%) 7.8리바운드 1.1어시스트로 대학 진학 이후 가장 좋은 시즌을 보냈다. 당장 주전으로 출장한 것을 떠나 평균 30분 이상을 뛰면서 그가 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대학 진학 이후 처음으로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는 등 팀에서 주요 전력으로 거듭났다. 당시, 컨퍼런스에서 평균 리바운드 3위, 평균 블록 12위에 올랐으며, 여러 단일 시즌 누적 기록에서도 20위 안에 자리하는 등 입지를 탄탄히 했다. 특히, 수비에서의 승리기여도에서 6위를 차지할 정도로 위상을 크게 높였다. 누적 득점 15위, 누적 리바운드 2위에 오르면서 보드 장악에서 위력을 떨쳤다.
그는 4학년 때까지 대부분의 경기에서 주전 파워포워드로 출장했다. 그러나 4학년인 1996-1997 시즌에는 28경기에 출격한 가운데 16경기 만 주전으로 뛰었다. 주전 경쟁에서도 확고하게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여러 선수가 대학을 마친 후 NBA에 진출하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데릭스가 냉정하게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지속하기 쉽지 않았음을 뜻했다. 그는 경기당 25.8분을 소화하며 9.3점(필드골 성공률: 46.4%, 3점슛 성공률: 28.6%, 자유투 성공률: 75%) 5.3리바운드 1.4어시스트에 그쳤다. 출전시간이 줄어들면서 기록 하락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균 어시스트는 직전 시즌 대비 소폭 늘었다. 그럼에도 그는 단일 시즌 누적 리바운드 10위, 평균 리바운드 10위, 평균 블록 20위에 오르면서 수비에서 여전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제한적인 가운데서도 수비 기여도에서 15위에 올랐을 정도로 안쪽 수비에서 강점을 보였다. 신장대비 기민한 움직임과 긴팔을 통해 상대 공격을 잘 막아낸 것이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으로 NBA 진출을 도모하긴 턱없이 모자랐다. 특히, 디트로이트가 속한
MC컨퍼런스가 돋보이는 지역대가 아니었으며, 데릭스의 개인 기록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를 마친 그는 지난 1997 NBA 드래프트에 지원했으나 호명을 받지 못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돋보이는 신체 조건과 탁월한 운동 능력으로 코트 위에서 영향력을 떨친 이가 많았기 때문. 결정적으로 데릭스는 몸싸움에서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긴팔을 통한 수비와 기동력에서는 강점이 있으나 NBA에서 뛰기에는 다소 마른 체형이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가 갖고 있는 장점이 NBA에서 통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안양에서
당시에는 NBA 진출이 좌절될 시에 미국 내 다른 리그에서 뛰었다. 현재는 G-리그로 하부리그가 최종적으로 일원화가 되어 있었으며, 이에 앞서 여러 선수들이 서머리그에서 기량 점검과 빅리그 진입을 위해 자웅을 겨룬다. 그러나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USBL, CBA에서 선수 생활을 지속한 이가 많았다. 데릭스 이후에 KBL을 두드린 여러 미국 선수처럼 그도 USBL을 거쳤으며, 이후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에서 뛰면서 국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스페인에서는 1부가 아닌 2부에서 뛰었으며, 지난 2000년에 KBL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 지원했다. 미 현지에서 열린 트라이아웃에서 데릭스는 좋은 모습을 보였고, 1라운드 6순위 SBS의 부름을 받았다. 2라운드에서는 플로터가 주무기인 데니스 에드워즈를 호명했다.
데릭스는 지난 2000-2001 시즌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리그 초반부터 트리플더블을 작성하기 시작하며 SBS의 간판 전력으로 떠올랐다. 시즌 막판에는 에드워즈가 한 경기에서 동반 트리플더블을 엮어내는 기염을 토해냈다. 데릭스는 2001년 3월 6일 열린 창원 LG와의 경기에서 20점을 포함해 12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신고했으며, 에드워즈는 19점 14리바운드 12어시스트로 활약했다. 이를 포함해 그는 해당 시즌에만 7번의 트리플더블을 작성했다(이번 시즌 나온 먼로의 트리플더블에 앞서 가장 최근 작성된 외국 선수 트리플더블이 바로 데릭스가 만들어 낸 것이다). 데릭스는 당시 생소했던 트리플더블을 여러 차례 기록하면서 팀의 주요 전력으로 꾸준히 활약했다. 이타적이었던 그는 동료들의 움직임을 잘 포착했다.
그러나 몸싸움에서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즈도 수비가 약했기에 SBS가 이들의 기록처럼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 당시 서울 SK는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뽑은 로렌조 홀을 대전 현대로 보내면서 재키 존스를 받았다. SK는 서장훈과 존스로 이어지는 막강한 트윈타워를자랑하며 좋은 성적을 거뒀다. 뿐만 아니라 데릭스가 다른 선수를 막는데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특히 현대의 홀과 SK의 서장훈을 수비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 이로 인해 SBS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쉽지 않았다.
SBS는 변화를 시도했다. 당시 SBS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인건 감독은 표필상을 주전으로 투입하면서 높이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당시 서장훈을 제외한 토종 센터들은 외국 선수 진입으로 힘을 쓰지 못할 때였다. 당장 운동 능력의 차이도 컸지만, 기술에서 한계가 많았으며, 신장을 갖추고 있으면 기동력에서 약점이 뚜렷했다. 그러나 표필상이 안쪽에 들어오고 에드워즈가 수비 부담을 덜어내면서 데릭스가 갖고 있는 높이와 기술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전으로 코트를 누비던 은희석(연세대 감독), 김성철(DB 코치)도 여유롭게 경기를 할 수 있었다. ‘은희석-김성철-에드워즈-데릭스-표필상’으로 이어지는 SBS의 주전 평균 신장은 리그에서 가장 높았을 정도. 190cm에 육박하는 은희석이 운영이 다소 간 약점이 있을 수 있으나 데릭스의 피딩으로 이를 메울 수 있었기 때문. 김성철도 195cm의 장신 포워드이긴 하나 외곽에서 기민하게 움직였던 만큼, 당시 SBS 주전 전력의 위력은 대단했다.
데릭스의 패스가 다른 동료들의 득점으로 연결이 됐으며, 김성철도 큰 신장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SBS가 다른 팀과의 매치업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표필상-데릭스-에드워즈’로 이어지는 라인업은 위력을 떨쳤다. 표필상도 주전 센터로 역할을 했으며, 데릭스가 자신의 자리인 파워포워드에서 뛴 것이 딱 들어맞았다. 표필상으로 인해 데릭스가 토종 선수와 매치업이 됐기에 공격에서 훨씬 더 여유롭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SBS는 시즌 중반에 8연승을 질주하면서 가파른 상승세를 자랑했다. 그는 시즌 평균 20.6점 12.2리바운드 5.8어시스트로 활약했고, SBS는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쳤다.
하지만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표필상의 부상으로 SBS는 전력 유지가 어렵게 됐다. 표필상의 이탈로 데릭스는 이전처럼 오롯하게 외국 선수와 매치업이 됐으며, 이는 곧 그의 장점이 희석되는 결과를 야기하고 말았다. 2001 플레이오프 첫 관문에서 SBS는 서울 삼성과 만났다. 당시 삼성은 주희정(고려대 감독), 문경은, 아티머스 맥클래리, 무스타파 호프가 주요 전력으로 뛰었으며, 데릭스는 호프와의 대결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호프의 골밑 공략을 막기가 쉽지 않았다. SBS는 힘든 경기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 시즌 내내 위력을 떨쳤던 장신 라인업을 가동조차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시즌 후, 에드워즈는 재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개인 공격이 많은 탓도 있었다. 그러나 리그 최고 트리플더블러로 이름을 날린 데릭스는 한 시즌 더 SBS와 함께 하기로 했다. SBS는 에드워즈와 재계약을 하지 않았으나 데릭스의 파트너로 퍼넬 페리를 품었다. 페리는 언더사이즈 포워드였으나 안정된 드리블로 상대를 요리하는 등 나름대로 안팎을 오가며 SBS의 전력을 지키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데릭스는 이전 시즌만 못했다. 다른 구단이 이미 그의 장점을 잘 파악했기 때문. 데릭스도 힘을 쓰지 못하면서 다소 부진했다. SBS는 공익 근무를 마친 김훈이 가세하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전반적인 성적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SBS는 6위로 시즌을 마쳤고 가까스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문제는 데릭스가 다친 것이었다. 그의 이탈로 SBS는 플레이오프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SBS는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2년 연속 주전 부상으로 인해 아쉽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시즌 후 SBS는 데릭스와 재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원주의 원조 우승 청부사
SBS와 결별한 데릭스는 이듬 해 중국리그(CBA)에서 뛰기로 했다. 그러나 몸싸움에 약점이 많았던 만큼, 중국에서 뛰는 외국 선수를 상대로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상까지 겹치면서 시즌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2002-2003 시즌 막판에 기회를 잡았다. 당시 TG는 2002 드래프트에서 김주성을 지명했고, 데릭 존슨과 데이비드 잭슨으로 외국 선수 전력을 꾸렸다. TG는 리그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시즌 막판에 존슨이 다치면서 전력 유지가 쉽지 않았다. TG는 존슨의 부상 대체로 데릭스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당시 존슨은 리그에서 단연 돋보이는 정통 센터였다. 안쪽에서 존재감이 대단했다.
그를 대신할 선수가 데릭스였던 만큼 우려도 적잖았다. 그렇지 않아도 안쪽에서 무게를 잡아줄 이가 없어졌기 때문. 그러나 반대로 데릭스의 존재로 TG가 플레이오프에서 좀 더 원활한 공격을 선보였다. 유효적절한 패스와 움직임으로 김주성, 양경민, 잭슨의 득점을 도왔다. 기동력을 갖춘 데릭스의 합류로 TG가 안쪽에서 몸싸움에는 약했으나 기동력은 돋보였다. TG는 플레이오프에서 빠른 공수 전환을 통해 1라운드부터 위력을 떨쳤다. 준결승마저 통과한 TG는 결승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대구 오리온스와 마주했다. TG는 6차전까지 치른 접전 끝에 오리온스를 따돌리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 때 우승은 3번시드로 차지한 첫 우승이었다. 결승전 6차전에서는 신종석의 3점슛이 결정적이었다. TG는 시즌 후 두 외국 선수와 재계약을 맺지 않았다. 데릭스와 재계약을 선호했으나 그럴 경우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후순위로 지명순번이 밀려나기 때문. 이에 TG의 전창진 감독(현 KCC 감독)은 1라운드에서 7순위로 앤트완 홀을 지명한 후 2라운드에서 데릭스를 불러들였다. 이로 인해 TG는 우승 전력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2년 연속 우승에 청신호를 켰다. 허재, 양경민, 김주성으로 이어지는 토종 선수 전력도 유효했으며, 데릭스도 지난 플레이오프보다 원활한 호흡을 자랑하며 TG가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데 일조했다.
당시 데릭스는 한국 무대로의 복귀를 두고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게 되어 기쁘다”고 운을 떼며 “우승 도전에 나서는 팀에서 뛸 수 있게 되어 좋다”면서 만족해 했다. 당시 홀의 합류를 두고도 “잭슨보다 좋은 조각이 될 것”이라면서 홀에 대한 기대감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농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자 “제 삶이다”라면서 농구 선수로 당연한 답변일 수 있으나 농구에 대한 진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시즌 중에 부상으로 한 달 여간 자리를 비웠다. TG는 부상을 당한 데릭스를 대신해 얼 아이크를 일시 대체 선수로 영입했다. 데릭스는 오른쪽 종아리 근육 파열로 약 한 달 동안 뛸 수 없었기 때문. 외국 선수의 부상은 팀의 전력 유지에 중요한 부분인 만큼, TG는 정통 센터 중 한 명인 아이크를 데려갔다. 그러나 TG는 리그 1위로 시즌을 마쳤던 만큼, 플레이오프에서 유리한 대진을 확보했다. 준결승에 선착했기 때문. 이에 데릭스가 휴식과 회복에 나설 여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TG는 데릭스를 팀에 합류하게 하면서 플레이오프를 준비할 수 있었다.
TG는 지난 시즌에 이어 결승에 진출했으나 찰스 민렌드가 이끄는 KCC에 패했다. 7차전까지 치르는 접전 끝에 KCC가 우승을 차지했다. 데릭스가 당시 KCC의 R.F. 바셋에게 밀린 것이 뼈아팠다. 그만큼 KCC의 바셋 영입이 주효했으며, TG는 KCC와의 매치업에서 앞서는 듯 보였으나 밀리기 시작했다. 민렌드가 TG의 수비를 어김없이 흔들었으며, 바셋이 데릭스를 상대로 우세한 모습을 보인 것이 주효했다. 데릭스와 TG는 2년 연속 결승에 올랐으나 아쉽게 연속 우승은 차지하지 못했다.
시즌 후 데릭스는 재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2004년을 기점으로 KBL은 외국 선수 선발을 종
전 드래프트에서 자유계약으로 바꾸었기 때문. 당시 제도 개선으로 인해 민렌드, 바셋, 앨버트
화이트를 제외하고 모두가 한국프로농구를 떠나야 했다. 그는 한국에서 개인통산 정규시즌 8
번의 트리플더블을 달성했으며, 외국 선수 중 화이트(10회)에 이어 크리스 윌리엄스와 함께 공동 2위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_ 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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