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포지션 넘나든 다재다능함의 대명사, 앨버트 화이트

이재승 기자 / 기사승인 : 2022-06-07 22: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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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6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바스켓코리아 웹진 1년 구매 링크,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5월호 단독 구매 링크)

KBL은 리온 데릭스에 이어 또 한 명의 트리플더블러와 함께 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인천 전자랜드에서 전성기를 보냈던 앨버트 화이트. 화이트는 지난 2003 외국 선수 드래프트를 통해 첫 선을 보였으며, 네 시즌 연속 프로농구 무대를 휘저었다. 전자랜드를 첫 준결승으로 이끌었으며, 많은 트리플더블을 엮어내며 많은 농구 팬들을 놀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03-2004 시즌에는 평균 득점 1위 자리를 두고 다투는 등 탁월한 기량으로 코트를 수놓았다. 지난 2011년에 은퇴한 그의 발자취를 살펴봤다.

프로 진출 이전
화이트는 미시건주 잉크스터에서 태어나 자랐다. 고교 시절부터 실력을 떨쳤다. 그는 지난 1995년에 미시건주 고교 선수에게 주어지는 미스터바스켓볼에서 3위를 차지했다. 비록 수상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그의 활약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또한, 전미 고교 선수에게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맥도널드 올-아메리칸에도 선정되는 등 최고급 선수로 손색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디트로이트 지역지가 선정하는 퍼스트팀에도 호명이 됐을 정도로 화이트는 자신의 지역을 넘어 미시건주에서도 유명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맥도널드 올-아메리칸에는 빈스 카터, 샤리프 압둘-라힘, 스테판 마버리, 앤트완 제이미슨, 케빈 가넷, 폴 피어스, 천시 빌럽스가 뽑혔을 정도로 대단한 이름값을 자랑했다. 이들 모두 NBA 진출은 물론 NBA에서 올스타까지 선정된 바 있는 대단한 이력을 쌓은 이들이다. 화이트의 실력이 이들에 견줄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거론이 됐을 정도였다는 것만으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 지난 1994년에는 18세 이하 아메리컵에 미국 대표로 선정이 됐다. 마버리, 압둘-라힘과 함께 하며 미국이 우승하는데 일조했다.
 

대학도 명문인 미시건주립대학교를 진학했다. NCAA 미시건스테이트 울버린스에서 뛰었다. 첫 시즌에 32경기에 나섰다. 이중 14경기에서 주전으로 출장하는 등 역할을 하긴 했으나 코트 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긴 어려웠다. 그는 경기당 22분을 소화하며 9.0점(필드골 성공률 : 39.8%, 3점슛 성공률 : 22.4%, 자유투 성공률 : 71.3%) 4.7리바운드 1.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미시건스테이트는 불미스러운 일에 연류 되어 있었고, 화이트도 이에 대한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37,000 달러를 수령한 것으로 확인이 되면서 조사에 나섰으나 기소가 되지 않았고, 그는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 그만큼 화이트가 대형 선수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당 사건으로 모교가 선수 영입 금지라는 중징계와 마주하게 됐다. 그는 한 시즌을 뛰지 못하는 징계를 감수하고 미주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생애 처음으로 다른 주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로 한 것.
 

미주리 타이거스에서 두 시즌을 보내면서 본격적인 대학 생활에 나섰다. 지난 1997-1998 시즌에는 20경기 출전에 그쳤다. 9경기에서 주전으로 뛰기도 했으나 학교를 옮겼음에도 크게 도드라지지 못했다. 그는 평균 22.9분 동안 10.9점(필드골 성공률 : 40.3%, 3점슛 성공률 : 34.0%, 자유투 성공률 : 71.1%) 4.9리바운드 2.1어시스트 1.1스틸을 올린 것이 전부였다. 대개 학교를 옮기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실력이 낮은 쪽으로 전학을 하는 만큼, 기록 향상이 동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화이트는 1년 뛸 수 없다는 것을 감수하고 전학했음에도 새로운 학교에서 좀처럼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당시 지휘봉을 잡고 있던 스티브 피셔 감독과 크게 부딪친 부분도 결정적이었다. 화이트는 여러 차례 팀을 벗어나는 등 농구 외적인 부분에서 지도자와 마찰을 일으켰다. 대신 그는 시즌 막판에 절치부심했다. 시즌 막판 7경기에서 경기당 11점 7리바운드를 올리면서 가능성을 보였다.
 

전학 후 첫 해에 아쉬움을 남겼던 그는 이듬해에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29경기에서 모두 주전으로 출장한 그는 평균 31분을 뛰며 16.3점(필드골 성공률 : 45.4%, 3점슛 성공률 : 29.5%, 자유투 성공률 : 68.6%) 8.7리바운드 3어시스트 1.3스틸을 올리며 펄펄 날았다. 이에 힘입어 올-빅12컨퍼런스 퍼스트팀에 선정이 됐다. 시즌 중에는 두 번이나 이주의 선수에 뽑히면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고교 시절 맥도널드 올-아메리칸에 뽑힌 데 이어 오랜 만에 큰 상을 받았다. 또한, 『CNN』과 『Sports Illustrated』가 선정한 빅12 올 해의 선수에도 뽑히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 때 화이트는 평균 득점, 평균 리바운드, 평균 어시스트에서 동시에 세 분야에서 팀내 1위를 차지했다. 미주리 역사상 이를 달성한 이는 화이트가 처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컨퍼런스에서 득점과 리바운드에서 공이 5위 이내 자리했을 정도로 화이트가 선보인 기량은 대단했다. 또한, 그의 활약에 힘입어 시즌 중에 미주리가 캔자스 제이호크스의 홈경기 35연승을 멈추게 했다. 해당 기록은 무려 1994년 2월 21일(이하 한국시간)부터 1999년 1월까지 만 5년 동안 지속됐던 연승 행진이었다. 화이트가 이끄는 미주리가 캔자스의 안방 행진에 확실하게 제동을 걸었다.
 

그는 대학 시절 자신이 거친 학교에서 모두 NCAA 토너먼트에 나선 경험이 있다. 미시건스테이트에 입학하자마자 화이트는 토너먼트에 나서는 기쁨을 맛봤다. 미시건스테이트는 당연히 좋은 성적을 거둔 학교인 만큼, 토너먼트에 오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7번시드로 토너먼트에 오르며 기대를 모았으나 1회전에서 텍사스 롱혼스에 80-76으로 패하면서 무기력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끝으로 1999년에 한 번 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화이트는 1라운드 탈락을 피하지 못했다. 8번시드로 토너먼트에 초청이 됐으나 마찬가지로 첫 관문에서 패한 것. 미주리는 뉴멕시코 로보스에 61-59로 석패했다.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NBA 진출을 갈망했다. 지난 1999 NBA 드래프트에 명함을 내밀었으나 끝내 호명을 받지 못했다. 당시에는 엘튼 브랜드, 스티브 프랜시스, 배런 데이비스, 라마 오덤 등 여러 굵직한 선수들이 각 구단의 호명을 받았다. 화이트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당시에는 고교 선수들의 NBA 직행이 가능했던 만큼, 조너던 벤더와 리언 스미스도 고졸임에도 1라운드에서 선발되며 많은 이목을 끌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향후 전력감으로 자리매김했던 론 아테스트, 리처드 해밀턴, 코리 머게티까지 2000년대를 누볐던 많은 선수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반대로, 드래프트에서 훌륭한 선수들이 상당 부분 쏟아졌던 만큼, 화이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KBL 진출 이전
비록 NBA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하부리그 지원에 나섰다. 현재에는 G-리그가 NBA의 공식 마이너리그로 자리하고 있으며, 구단 수도 NBA와 엇비슷하지만, 당시에는 USBL, CBA(Continential Basketball Association)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이트는 CBA 드래프트에 나섰으며, 수폴스 스카이포스(현 마이애미 산하 G-리그팀)에 지명이 됐다. 첫 시즌을 잘 보낸 그는 CBA 올-루키팀에 뽑혔다. 지난 1999-2000 시즌부터 두 시즌 동안 수폴스에 몸담았으며, 지난 2000-2001 시즌부터 USBL의 플로리다 시드래건스에서 뛰었으며, 이듬해에는 플로리다와 오클라호마 스톰에서 뛰며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
 

또한 영국리그의 브라이튼 베어스에서 잠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2002-2003 시즌에 다시 CBA로 돌아간 그는 락포드 라이트닝에서 당해 시즌 평균 득점 4위와 공격 리바운드 7위에 오르는 저력을 발휘했다. 잇따라 팀을 옮기기는 했으나 프로 생활에 비로소 적응을 마친 듯 남다른 공헌도를 자랑하며 코트를 누볐다. 그는 올-CBA 세컨드팀에 자리했으며, 시즌 후, KBL에서 뛰기로 했다.

인천에서의 전성기
화이트는 프로농구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 지원했다. 그는 2003 외국 선수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순위로 유재학 감독이 이끄는 전자랜드의 부름을 받았다. 화이트는 첫 시즌부터 단연 돋보였다. 시즌 내내 1순위로 전주 KCC로 향한 찰스 민렌드와 함께 평균 득점 1위 자리를 두고 시즌 내내 치열하게 다퉜다. 민렌드는 KCC에서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과 함께하면서 좋은 전력을 다졌다. 시즌 막판에는 R.F. 바셋이 가세하면서 선수 구성이 단연 돋보였다.
 

반면 화이트가 이끄는 전자랜드는 토종 선수층이 돋보이지 않았다. 2라운드에 호명된 제이슨 윌리엄스, 전자랜드의 토종 주포인 문경은과 함께 뛰면서 막강한 삼각 편대를 자랑했다. 그러나 백코트 전력이 약했던 만큼, KCC나 원주 TG(현 DB)처럼 높은 곳으로 올라가긴 쉽지 않았다. 가드진이 다소 취약했고, 그 중에서도 뚜렷한 포인트가드가 없었던 전자랜드는 화이트가 경기 운영을 상당 부분 관여하면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했다. 화이트의 활약에 힘입어 전자랜드는 시즌 막판에 특히 더욱 돋보였다. 시즌 중에 7연승 가도를 달리기도 했던 전자랜드는 시즌 막판에 6연승을 질주하며 리그 4위까지 껑충 뛰어 올랐다.
 

화이트는 첫 시즌인 지난 2003-2004 시즌에 평균 26.2점(2점슛 성공률 : 52.2%, 3점슛 성공률 : 30.7%, 자유투 성공률 : 76.5%) 8.8리바운드 7.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펄펄 날았다. 다재다능한 면모를 뽐내면서 다수의 트리플더블을 엮어내는 등 득점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남다른 기여도를 자랑했다. 비록 평균 득점 1위는 민렌드에게 근소한 차이로 뒤지면서 밀렸지만, 평균 어시스트 3위에 올랐다. 포워드임에도 어시스트 순위 3위 이내 들었을 정도로 그의 경기력은 돋보였다. 미국에서 주로 스윙맨으로 나선 그였으나 KBL에서 경기 운영을 도맡기 충분했다. 윌리엄스가 많은 더블더블을 엮어낸 가운데 화이트가 경기를 주도했고, 문경은이 외곽에서 힘을 내면서 전자랜드가 기대 이상의 첫 시즌을 보냈다.
 

주득점원이자 포인트포워드로 역할을 했던 그는 당해 시즌에 트리플더블만 무려 8번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리온 데릭스가 지난 2000-2001 시즌에 달성했던 단일 시즌 트리플더블(6회) 기록을 갈아치웠다. 특히, 시즌이 반환점을 돈 이후 자신이 만든 트리플더블 대부분을 엮어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리그 적응을 본격적으로 마친 듯, 시즌 막판에 큰 활약을 펼치며 전자랜드의 상승세를 확실하게 이끌었다. 더 놀라운 것은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그는 TG와의 경기에서 18점 19리바운드 1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경기에서는 많은 득점이 불필요하게 나왔고, 이른 바 ‘밀어주기’ 논란으로 인해 이 때 기록은 조망을 받지 못했다.
 

플레이오프에 나선 전자랜드는 첫 관문에서 서장훈이 이끄는 서울 삼성과 마주했다. 홈코트 어드밴티지가 있었던 전자랜드는 1차전에서 화이트가 18점 10리바운드 12어시스트로 플레이오프 데뷔를 승리로 장식했다. 트리플더블 신고와 함께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측면에서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2차전에서 삼성은 김택훈을 화이트의 전담 수비수로 내세우면서 반전을 꾀했고, 화이트는 김택훈의 거친 수비에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흔들리고 말았다. 공격에서 활로를 뚫어야 하는 화이트가 부진하면서 전자랜드도 기세를 잃고 말았다. 다시 홈으로 돌아온 전자랜드는 3차전에서 화이트가 이날 최다인 42점을 폭발하면서 팀의 준결승 진출에 앞장섰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자랜드가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 진출한 것은 처음이었다.
 

준결승에 진출하면서 큰 성과를 달성했으나 막상 시리즈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TG의 데릭스-김주성으로 이어지는 높이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TG는 전자랜드를 상대로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으면서 완승을 거뒀다. 화이트는 이 기간 동안 무려 경기당 25.7점 10.0리바운드 6.7어시스트로 어김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윌리엄스가 TG의 더블포스트에 고전했고, 화이트도 여느 때와 달리 성공률이 크게 돋보이지 않은 측면도 없지 않았다.
 

시즌 후, KBL은 외국 선수 제도를 종전 드래프트에서 자유계약으로 바꿨다. 그러나 화이트는 재계약에 성공했다. KCC의 민렌드, 바셋과 함께 단 세 명이 재계약에 성공한 것. 전자랜드는 화이트를 앉히면서 전력 유지에 힘썼으나, 지도 체제가 바뀌어야 했다. 유 감독이 울산 모비스로 건너갔고, 전자랜드는 박수교 감독을 앉혔다. 선수 구성에 변화도 잇따랐다. 조동현을 내보내고 박규현과 김태진을 데려왔다. 상대적으로 많은 금액을 이들에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박상률이 최명도를 대신해 주전으로 나서는 빈도가 높았다.
 

결정적으로, 외국 선수 계약이 신통치 못했다. 전자랜드는 화이트의 골밑 파트너로 하이렘 풀러와 계약했다. 풀러는 비록 NBA에 드래프트되지 못했으나 지난 2004-2005 시즌 막판에 애틀랜타 호크스와 10일 계약을 체결하며 빅리그를 경험했다. 그는 계약기간 동안 네 경기에 나서 평균 10.8분을 뛰며 2점 2.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많진 않았지만 NBA에서 뛴 경험이 있었던 만큼, 새롭게 선보이는 외국 선수 중 단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풀러는 국내 무대에서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전자랜드는 6경기 만에 풀러를 방출했고, 이어 여수 골드뱅크에서 뛴 경험이 있는 마이클 매덕스를 데려왔으나 모자랐다. 매덕스를 대신해 가이 루커도 품었으나 끝내 힘을 쓰지 못했다.
 

화이트는 지난 2004-2005 시즌에 54경기에 모두 나서 평균 23.3점(2점슛 성공률 52.2%, 3점슛 성공률 : 31.3%, 자유투 성공률 : 70.4%) 9.5리바운드 5.4어시스트로 어김없이 제 몫을 해냈다. 문경은도 토종 득점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지난 시즌에 윌리엄스가 그랬던 것처럼 안쪽에서 활약하는 이가 없었다. 화이트와 문경은이 원투펀치로 역할을 했으나 영입한 선수들이 뚜렷한 경기력을 선보이지 못했으며, 리그 최하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전 시즌에 리그 4위에 올랐던 팀이 졸지에 플레이오프 진출은 고사하고 하위권으로 밀려나며 체면을 구겼다.
 

전자랜드는 오프시즌에 한 번 더 변화를 꾀했다. 박수교 감독을 단장으로 임명했고, 직전 시즌까지 TG에서 전창진 감독을 보좌했던 제이 험프리스 코치를 신임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외국 선수 영입도 성공적이었다. 리 벤슨을 데려오면서 골밑 전력을 확실하게 채웠다. 화이트가 실질적인 포인트가드로 역할을 하는 데 벤슨이 안쪽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기 충분했기 때문. 그러나 시즌 초반에 화이트가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전열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화이트의 부상 이후, 헤롤드 아세노, 온타리오 렛이 가세했지만, 화이트의 공백을 메우긴 어려웠다. 전력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화이트가 빠지면서 전자랜드는 벤슨에게만 의존하는 농구를 펼쳤다.
 

시즌 중에 전자랜드는 트레이드에 나섰다. 팀의 얼굴이나 다름이 없었던 문경은을 서울 SK로 보내기로 했다. 대신 임효성과 김일두를 받아왔다. SK는 벤치 전력을 다지면서도 상황에 따라 방성윤과 함께 뛸 수 있는 문경은을 데려오면서 전력을 다졌다. 전자랜드는 노장을 내주는 대신 유망주를 품은 셈이다. 그러나 임효성과 김일두가 팀에서 뚜렷한 역할을 맡지 못하면서 전자랜드의 전력은 더욱 약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부상에서 돌아온 화이트가 전자랜드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전력도 약했을 뿐만 아니라 부상 여파로 인해 활약이 이전 두 시즌만 못했기 때문.
 

결국, 전자랜드는 시즌 중에 그를 방출하면서 결별했다. 화이트는 지난 2005-2006 시즌에 17경기에서 경기당 16.6점(2점슛 성공률 : 45.5%, 3점슛 성공률 : 27.9%, 자유투 성공률 : 70.9%) 6.6리바운드 4.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팀의 실질적인 기둥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부진한 활약도 결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수들을 제대로 아우르지 못했다. 당시 전자랜드는 문경은마저 트레이드되면서 크게 실망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팀의 주축으로 동료들을 독려하기보다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인 적도 적잖았을 정도. 화이트는 전자랜드를 대표하는 외국 선수이면서도 팀을 대표하는 선수였음에도 끝내 세 시즌을 꽉 채우진 못했다.

원주에서 & KBL 떠난 이후
화이트는 오프시즌에 리그 내 다른 구단과 계약과 실패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에 동부(현 DB) 유니폼을 입게 됐다. 당시 동부는 로베르토 버거슨을 새로운 득점원으로 낙점했다. 그러나 버거슨이 부진했고, 동부의 전창진 감독은 버거슨을 화이트로 바꾸기로 했다. 화이트는 좋은 조각이 됐다. 직전 시즌까지 함께 했던 신기성이 부산 KT(현 수원)로 이적하면서 경기 운영이 공백이 생겼기 때문. 이에 포인트포워드로 뛸 수 있는 화이트로 하여금 공격과 함께 운영을 동시에 채우고자 했다. 무엇보다, 당시 국내 최고 선수인 김주성과 함께 하게 된 만큼, 화이트의 가세로 동부가 좀 더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점쳐졌다. 수비 부담도 덜게 될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처럼 사실상 스윙맨으로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
 

그러나 화이트도 돋보일 정도로 힘을 쓰진 못했다. 지난 2006-2007 시즌에 코트를 누빈 외국 선수들의 기량이 실로 대단했기 때문. KBL에서 두 번째 시즌을 맞으면서도 자유계약 첫 해에도 어김없이 활약한 그였으나, 이후에는 당시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무리한 공격을 시도하기 일쑤였고, 운영에서도 기대했던 것처럼 원활하지 못했다. 즉, 전반적인 경기력이 전자랜드에 몸담았을 때와는 달랐다. 결국, 동부는 시즌 중에 한 번 더 외국 선수를 바꾸기로 했다. 화이트를 내보내고 빈센트 그리어와 함께 남은 일정을 치렀다. 뛰는 동안 화이트는 동부에서 31경기에 나서 평균 18.3점(2점슛 성공률 : 47.3%, 3점슛 성공률 : 35.7%, 자유투 성공률 : 70.9%) 5리바운드 3.7어시스트를 올렸으나 방출을 피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미국 독립리그와 같은 곳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푸에르토리코와 베네수엘라에서 뛰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소속팀이 우승하는데 힘을 보탰으며, 그는 자신이 뛴 대부분의 리그에서 올스타로 선정이 된 바 있으며, 2002년과 2003년에 각각 USBL과 CBA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07년에 베네수엘라에서도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끝으로 지난 2011-2012 시즌을 앞두고 캐나다리그(NBL)의 런던 라이트닝 엔트리에 돌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방출을 피하지 못했고, 선수 생활을 마쳤다.

 

사진_ 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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