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유명 달리한 제스퍼 존슨, 돌아보는 그의 선수 시절

이재승 기자 / 기사승인 : 2021-10-09 09: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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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9월호에 게재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KBL팬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제스퍼 존슨이 유명을 달리한 것. 사인은 심장마비로 확인이 됐다. 그의 사망으로 그와 함께 코트를 누볐던 외국 선수와 국내 농구 관계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KBL에서 득점 1위, 최우수 외국 선수에 선정이 됐고, 추후에는 대체선수로 고양 오리온과 부산 KT에서 기대 이상의 역할을 했던 그를 팬들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에 그가 걸어갔던 발자취를 뒤쫓아보며 그의 농구 생활을 돌이켜 봤다. 글에 앞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돋보였던 대학시절과 변곡점이었던 G-리그 생활
존슨은 NCAA 서던미스 골든이글스를 거쳤다. 서던미시시피대학에서 뛰며 활약했다. 해가 갈수록 발전하면서 조금씩 역할을 늘렸다. 신입생일 때는 평균 20분을 뛰지 못했다. 그러나 2학
년서부터 조금씩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력이 온전치 않았던 서던미시시피는 지난 2004-2005 시즌에 존슨이 센터로 나서야 했다. 그간 맡아본 바 없는 역할을 맡았으나 골밑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당시 그는 17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러나 평균 25.1분을 소화하며 15.1점 5.1점(.579 .333 .867) 7.4리바운드 0.9어시스트 1.2스틸을 기록했다. 팀에서 가장 많은 평균 득점을 올렸으며, 평균 리바운드 또한 팀내 1위에 올랐을 정도로 두각을 보였다. 하지만 팀은 컨퍼런스 USA 최하위를 피하지 못했다.
 

존슨은 NBA에 진출하기에 모자랐다. 포워드인 그가 NBA에 진출하긴 더욱 어려웠으며, 경쟁력을 갖추기 쉽지 않았다. 대학시절 센터로 나서긴 했으나 정통 빅맨이 아닌 만큼 역할은 더욱 모호했다. 드래프트에 신청하더라도 지명을 받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지명 불발 이후 서머리그에 참가한다고 하더라도 각 팀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 신장 대비 체중이 적지 않은 존슨이 미국에서 프로선수로 뛰는 것은 어려웠다. 결국, 그는 4학년이 되자마자 결단을 내렸다. 전학을 택한 것. NCAA는 전학할 경우 한 시즌 유급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 존슨은 한 시즌 출장할 수 없음에도 학교를 옮기기로 했다.

# 존슨의 대학시절
2002-2003 26경기 19.3분 11.3점(.439 .283 .852) 4.3리바운드 0.5어시스트 0.5블록
2003-2004 28경기 23.1분 12.7점(.470 .346 .713) 5.7리바운드 1.0어시스트 1.2스틸
2004-2005 17경기 25.1분 15.1점(.579 .333 .867) 7.4리바운드 0.9어시스트 1.2스틸
2005-2006 1경기 후 편입
 

그는 NCAA 2부에 위치한 델타스테이트에서 대학시절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2부로 자리를 옮
기자 존슨의 역량은 더욱 돋보였다.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는 다재다능함을 펼칠 수 있는 맞는 무대를 찾았다. 1부에서도 부족하지 않은 경쟁력을 선보인 그는 2부에서 주전 빅맨으로 나서며 평균 20.6점 8.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존슨을 품은 델타스테이트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에 힘입어 존슨은 NCAA 2부에서 한 시즌을 보냈음에도 미시시피주 최고 대학선수에게 주어지는 하웰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영예를 안았다. 하웰 트로피는 지난 2004-2005 시즌부터 수상하기 시작했으며, 존슨이 역대 두 번째로 선정이 됐다. 놀랍게도 그는 2부 출신 선수로 유일한 수상자로 남아 있다. 주로 1부인 미시시피스테이트 불독스에서 뛰는 이들이 선정되나 존슨은 2부 출신임에도 대학 최고 선수에게 주어지는 트로피를 품었다.
 

대학을 마친 그는 어김없이 농구선수로 생활을 원했다. NBA 진출을 도모하긴 어려웠으나 G-리그에서 뛰기는 충분했다. 당시 그는 49경기에서 평균 32.5분을 뛰며 17.2점(.486 .442 .894) 8.2리바운드 2.8어시스트 1.6스틸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발휘했다. G-리그 진출에 앞서서는 브라질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존슨은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리바운드 4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선수효율에서도 8위에 자리하는 등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다.

# 존슨의 G-리그 성적
2008-2009 49경기 32.5분 17.2점(.486 .442 .894) 8.2리바운드 2.8어시스트 1.6스틸

KBL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존슨
G-리그에서 뛰면서 다른 곳에 존재감을 알린 그는 이후 KBL 외국선수 드래프트에 참가하기로 했다. 트라이아웃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그는 2009 드래프트 2라운드 6순위로 부산 KT에 지명이 됐다. 당시 KBL은 외국선수 한 명만 출전이 가능한 제도였다. 이에 많은 팀들은 센터를 선발해 안쪽 전력을 다지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KT의 전창진 당시 감독은 2라운드에서 존슨을 불러들여 다른 부분을 채웠다. 당시 KT에는 조성민, 박상오, 송영진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윙맨과 포워드를 극대화하기 위해 존슨의 능력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KT는 존슨과 함께 강호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라운드에서 뽑은 선수가 아닌 존슨이 주요 전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창진 감독이 추구하는 모션 오펜스를 운영하는 첨병으로 거듭났다. 하이포스트와 윙에서 공격전개에 나설 때 위력적이었다. 상대 외국선수가 주로 센터인 점도 존슨이 공격으로 상대를 요리하기 좋았다. 외곽에서 상대를 끌어낸다면 존슨이 승산이 있었다. 안쪽 수비에서도 전 감독의 수비 전술과 존슨이 체중이 적지 않은 만큼, 자리싸움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대학 졸업반일 당시 센터를 소화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안쪽 수비 부담이 줄어들면서 존슨이 본격적으로 팀을 이끌기 시작했다. KT에는 장신 포워드가 즐비한 부분도 존슨에게 도움이 됐다. KT가 수비에서도 안정된 모습을 보였고, 다소 아쉬웠던 경기 운영과 공격 전개에서 존슨이 중심을 잘 잡았다. 특히 기존 토종선수와 호흡이 단연 돋보였다. 외곽 공격과 패스를 통해 경기를 잘 풀어갔으며, 상대 수비를 끌어 모은 후 국내선수를 살리는 부분까지 돋보였다. 이에 힘입어 존슨은 최우수 외국선수로 선정되는 등 단연 돋보였다.
 

당시 KT는 1라운드 5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고, 그렉 스팀스마(후에 NBA 진출)를 선발했다. 상대적으로 수비적인 선수인 스팀스마를 1라운드에서 지명한 것. KT에는 조성민, 김도수, 박상오 등 기존 선수층이 얇지 않았고, 안쪽 수비에서 오히려 중심을 잡는 것을 우선시 했다. 그러나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KT는 스팀스마와 결별했다. 졸지에 존슨이 주요 전력으로 떠오른 것. KT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1라운드에서 지명한 외국선수가 바뀌었음에도 존슨이 있어 무리 없이 시즌을 준비할 수 있었다.
 

전 감독은 선수 선발 당시 그의 개인 능력을 높이 샀다. 다른 팀에서 그의 체중에 집중했다면, 전 감독은 그의 농구 센스와 이해도를 우선했다. 이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선발은 전 감독, KT, 존슨에 대한 평가를 확실하게 뒤집었다. 전 감독은 팀을 옮긴 이후에도 여전한 지도력을 선보이며 원주에서 부산으로 무사히 안착했다. KT는 처음으로 리그 2위를 차지하며 지난 2006-2007 시즌 준우승의 아쉬움을 달랬다. 존슨도 리그 최고 선수로 거듭나면서 이후 전망을 더욱 밝혔다. 존슨은 평균 19.5점 7리바운드 3.3어시스트로 제 기량을 펼쳤다.
 

중요한 순간마다 집어넣은 3점슛도 큰 도움이 됐다. 안정된 볼 핸들링과 슛 터치를 자랑했다. 39.8%라는 높은 3점슛 성공률을 자랑하며 공격에서 큰 도움이 됐다. 그가 3점슛을 갖추고 있기에 다른 팀도 매치업이 쉽지 않았다. 그를 막기 위해 다른 외국선수가 밖으로 나오면 안쪽이 비었고, 그 사이 국내 선수들의 움직임과 존슨의 패스를 통해 KT가 꾸준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이에 힘입어 리그 수위권 팀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 KT는 다른 외국선수로 찰스 로드를 품었다. 로드는 KT가 부족한 안쪽에서 역할을 많이 했다. 존슨은 로드와 나누어 뛴 만큼, 개인기록은 이전만 못했다. 그러나 뛸 때의 생산성과 기존 역량은 충분했다. 지난 2009-2010 시즌에 2위에 그친 KT였으나 안쪽 전력이 채워지자 좀처럼 적수를 찾기 어려웠다. 이에 KT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리그 1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순간에 부상이 찾아오고 말았다. 시즌 막판에 존슨이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다. KT는 대체선수를 찾았으나 존슨처럼 역할을 해준 이는 많지 않았다.
 

존슨의 부상은 결정적이었다. 전력의 절반이라 하더라도 과언이 아닌 그가 빠지면서 공격의 중심이 빠진 채 남은 일정을 치러야 했다. 리그 1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플레이오프에서 드러나고 말았다. KT는 원주 동부(현 DB)와의 준결승에서 무릎을 꿇었다. KT는 역사상 두 번째로 리그 1위를 거두고도 준결승에 오르지 못한 팀이 되고 말았다. KT는 아쉽게 시즌을 마쳤고, 끝내 그토록 염원하던 우승에 다가서지 못했다. KT는 준결승에 선착하고도 결승 진출에 도달하지 못해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KBL은 2011-2012 시즌을 앞두고 외국선수 제도를 바꿨다. 종전 2인 보유 1인 출전에서 1인 보유 1인 출전으로 바꿨다. KT는 존슨이 아닌 다른 선수와 함께 하기로 했고 재계약을 맺지 못했다. 지난 시즌 함께 하며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로드와 함께 하기로 했다. 1인 보유인 만큼 포워드인 존슨보다 센터인 로드의 가치가 KBL에서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존슨은 KBL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기회는 있었다. 서울 SK와 시즌 도중 계약하게 된 것. 당시 SK는 알렉산더 존슨과 함께했다. 그러나 존슨이 시즌 도중 다쳤고, 대체 선수를 찾아야 했다. SK는 지난 두 시즌 KBL에서 뛰며 좋은 기량을 선보인 존슨을 찾았다. 그러나 존슨은 가뜩이나 체중이 적지 않은 가운데 몸 관리가 여의치 않아 보였다. 경기 중에서도 이전과 같은 날렵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대체선수로 팀에 녹아들기도 한계가 적지 않았다. 그는 5경기에서 평균 11.2점 5.8리바운드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지난 2009-2010 시즌 최고 외국선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러나 존슨은 2011-2012 시즌에 앞서 다시 KT와 함께 하기로 했다. KT는 시즌 직전에 외국 선수를 교체하기로 했다. 지난 2011-2012 시즌에도 꾸준히 플레이오프에 나섰으나 거기까지였다. 결국, KT는 존슨과 다시 재회했다. 존슨은 어김없이 팀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SK에서의 활약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KT에서 다시 날아올랐다. 단 한 경기에서 자리를 비운 그는 53경기에서 19.7점 8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존재감을 뽐냈다. 수비에서의 움직임은 다소 아쉬웠으나 공격에서 여전한 실력을 뽐냈다.
 

그러나 KT는 더 이상 이기는 팀이 아니었다. 2011-2012 시즌에 3위를 거둔 KT였으나 존슨과 함께 하고도 KT는 하위권을 맴돌기 시작했다. KT는 창단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존슨은 평균 득점 1위에 오르는 등 녹슬지 않은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KT의 선수 구성과 약해진 수비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어려웠다. 존슨은 시즌 후 재계약을 맺지 못했다. KT도 2012-2013 시즌부터 대대적인 재건에 돌입하기로 하면서 힘든 시간을 맞이해야 했다.
 

팀 성적은 모자랐으나 개인 성적은 충분했다. 이에 존슨은 2013 외국선수 드래프트에서 서울 삼성에 호명됐다. 서울 삼성은 2라운드 3순위로 존슨을 지명했다. 이미 재계약한 팀이 있어 존슨은 전체 10순위로 삼성 유니폼을 입기로 했다. 당시 삼성은 김동광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으나 전력 구성이 돋보이지 않았다. 이정석, 이동준 등이 버티고 있었으나 플레이오프에 도전하기 모자랐다. 김 감독은 시즌 중 자진 사퇴했고, 김상식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이끌었다.
 

존슨은 54경기에 모두 나서 누구보다 꾸준히 코트를 밟았다. 경기당 15.6점 5.4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올렸다. 어느덧 KBL 경력자이자 베테랑이 된 그는 선수들을 잘 이끄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기력은 KT에서와 달랐다. KT에서처럼 특정 전술에서 좀 더 위력을 떨쳤으나 삼성에서는 제대로 활약하기 쉽지 않았다. 국내 선수층도 당시 KT와 당시 삼성의 차이는 적지 않았다. 삼성도 사실상 개편작업을 앞두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존슨이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아 보였다.

시작된 전문 대체선수
삼성에서 뛴 이후 그는 KBL과 인연이 이어지기 어려워 보였다. 지난 2014-2015 시즌에는 이스라엘리그에서 오롯한 한 시즌을 보냈다. 대체 선수로 뛴 경험도 있고, 5시즌 연속 KBL 무대에서 뛰었고, 꾸준히 뛴 적도 네 시즌이나 되는 만큼, 차기 대체선수로 합류할 지도 관심을 모았다. 그러는 도중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다. 당시 선두권에 꾸준히 자리한 고양 오리온의 에이스인 애런 헤인즈가 다친 것. 이에 오리온은 대체선수를 물색했고, 다름 아닌 존슨을 택했다.
 

관건은 그의 몸 상태였다. 이스라엘에서 한 시즌을 보낸 이후 한 동안 뛰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대체선수로 들어온 존슨의 몸 상태는 여전히 무거워 보였다. SK에서 대체선수로 뛸 때보다 체감상 체중관리가 더 잘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에 존슨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으며, 모처럼 우승권에 다가서 있는 오리온의 상승세에 적지 않은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였다. 자신의 득점과 국내선수를 고루 살리는 헤인즈의 활약을 고려하면 그를 대신해야 하는 존슨이 제 몫을 해내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존슨은 기대 이상의 역할을 했다. 당시 오리온의 추일승 감독이 추구하는 농구에 완벽한 조각이 됐다. 헤인즈와는 비슷하나 다른 스타일로 팀의 중심을 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내외곽을 넘나들며 득점을 올렸고, 국내선수들에게 기회를 잘 만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토종선수들이 살아났다. 당시 오리온은 김동욱(KT), 허일영(SK), 최진수(현대모비스), 이승현, 장재석(현대모비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중 장재석을 제외한 빅포워드는 언제든 3점슛을 시도할 수 있었다. 존슨은 토종선수를 잘 살렸다.
 

당시 존슨의 몸 상태를 보면 국내선수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존슨이 받쳐줄 것으로 예상이 됐다. 그러나 상호 보완하면서 서로가 상생했고, 코트 위에서의 공격 생산성은 대단했다. 존슨이 기대 이상으로 활약했고, 국내선수들의 득점력도 뒤지지 않았다. 이에 존슨이 반사이익을 누리며 외곽에서 순도 높은 득점을 올렸다. 당시에는 2, 3쿼터에 외국선수가 두 명이 뛸 때였다. 존슨은 조 잭슨, 국내선수와 함께 오리온의 농구를 정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 당시 잭슨을 팀에 녹아들게 하는데 큰 공헌을 했고, 이에 오리온이 헤인즈의 부상에도 상승 기류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당시 오리온은 2, 3쿼터에 헤인즈와 잭슨이 동시에 뛸 때 조합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 때, 추 감독은 잭슨을 벤치로 불러들인 적도 많을 정도로 호흡이 돋보이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잭슨이 저조했다. 그러나 존슨이 뛸 때 잭슨은 달랐다. 존슨은 코트 안팎에서 잭슨을 아울렀다. 이는 오리온이 기대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했다. 결국, 잭슨이 존슨 영입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면서 오리온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존슨은 기록 이상의 활약을 펼쳤고, 오리온은 잭슨이 공격의 선봉에 나서면서 팀이 정돈됐다. 안쪽 수비에서 아쉬움이 있었으나 이승현이 있어 든든했고, 장재석도 뒤를 받치고 있었다. 결국, 오리온은 주포인 헤인즈의 부상에도 좋은 경기를 했다. 이 때 오리온은 돌아오는 헤인즈를 대신해 존슨으로 완전교체도 적극 검토했다. 추 감독의 고민도 깊어졌다. 결국, 헤인즈가 돌아온 가운데 존슨으로 교체될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 때 KT가 나섰다. 외국선수 교체를 원했던 KT는 존슨 가승인을 신청했다. 존슨은 KT에 새둥지를 틀게 됐다. 존슨은 KT 소속이 된 이후 마커스 블레이클리와 함께 해 오리온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오리온은 어쩔 수 없이(?) 헤인즈와 함께 하게 됐다. KT는 당시 코트니 심스가 부상 중이었다. 조동현 감독(현대모비스 코치)은 존슨 영입을 희망했고, 정규시즌 순위가 낮았던 KT가 우선권이 있었기 때문. 존슨은 제도적인 상황으로 인해 다시 부산으로 향하게 됐다. 당시 기자는 부산으로 돌아온 존슨과 코트 위에서 대화를 나눈 바 있다. 부산으로 오게 된 소감을 묻자 “한국의 고향에 온 것 같다”면서 밝게 웃은 그는 같이 뛰던 선수들과 재회한 것에 대해 크게 반가워했다. 조 감독, 송영진 코치(휘문고 코치), 박상오와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도 잔뜩 표현했다.
 

우승 직후 추 감독도 존슨의 기여에 대해 높이 샀다. “존슨이 팀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고 입을 열며 “플레이오프에 함께하지 못했으나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존슨은 KBL에서 생애 첫 우승을 경험했다. 시즌 중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도 추 감독은 존슨의 보이지 않는 공헌도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입 당시 우려를 보이기도 했으나, 존슨이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서 국내선수들과 잘 융화했다. 결정적으로 교체 후보가 될 수 있었던 잭슨의 각성까지 이끌어냈다. 이에 잭슨은 결승전 MVP에 선정되면서 존슨의 가르침에 힘입어 최고 시즌을 보냈다.
 

존슨은 이후 한 시즌 더 함께 했다. 당시 유달리 외국선수 불운에 시달렸던 KT는 2016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로 크리스 다니엘스를 지명했다. 그러나 다니엘스는 부상으로 단 한 경기를 치르지도 못했다. 전지훈련도 함께 하며 시즌 준비에 나선 그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KT는 시즌 시작도 전에 외국선수를 교체하기로 했다. KT는 이 때 다시 존슨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존슨과 함께 하는 동안 새로운 선수를 찾았다. 이후 12월 중에 오리온의 헤인즈가 다시 다쳤고, 존슨이 오리온에서 다시 함께 했다. 그러나 당시 오리온의 단신 선수는 오데리언 바셋으로 잭슨과는 달랐기에 우승 당시의 전력은 아니었다.
 

존슨은 지난 2016-2017 시즌을 끝으로 KBL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에도 대체선수로 물망에 오르긴 했으나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았기에 KBL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KT, SK, 삼성, 오리온까지 네 팀에서 뛰었으며, KT와 오리온에서 크게 중용을 받았다. 부산에서 자신의 전성기를 보냈으며, 고양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 외 삼성에서도 오롯하게 한 시즌을 보내는 등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다.

존슨을 기억하는 이들
그간 근황을 접하기 어려웠으나 지난 7월 말에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확인됐다. 공교롭게도 지난 2011-2012 시즌에 KBL에서 뛰었던 외국선수 중 세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잭슨 브로먼, 크리스 윌리엄스에 이어 존슨마저 뜻하지 않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함께 했던 로드 벤슨은 자신의 SNS를 통해 함께 코트를 누볐던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 슬픈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 외 그와 함께 국내 무대를 누볐던 선수들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와 함께 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추 전 감독은 “미국에서 경기 끝나고 한국으로 오는데 소식을 접했다”면서 한 숨을 내쉬웠다. 그가 우승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 그는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조동현 코치도 마찬가지. 선수와 지도자로 KT에서 함께 했던 그도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이미 명을 달리 했는데...”라며 안타까워 한 그는 “이후 더 연락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만 하다”며 거듭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끝으로 필자도 그와 직접 만나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바 있기에 그의 사망 소식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사진_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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