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선수 신종석’이 만든 기적, ‘농구인 신종석’이 배운 가치

손동환 기자 / 기사승인 : 2022-03-30 15: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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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 시각은 2022년 1월 13일 오후였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한 식스맨이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3점슛 5개’로 200% 이상의 실적을 남겼다.
한 식스맨의 활약이 한 팀의 창단 첫 우승을 만들었다. 2002~2003 시즌 원주 TG(현 원주 DB)에 일어난 일이다. 그 기적을 만든 주역은 현재 인헌고 코치로 재직 중인 신종석이었다.
신종석은 인터뷰 서두에 “제가 인터뷰를 해도 괜찮을까요?”라는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KBL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큰 임팩트를 낸 인물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수 신종석’을 다시 이야기하게 된 핵심 요인이었다.
‘농구인 신종석’은 인터뷰 말미에 농구 인생의 핵심 가치를 이야기했다. 그런 그의 이야기는 더 진솔하게 다가왔다. ‘농구인 신종석’이 배운 가치는 어느 사회에든 어느 사람에게든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랬던 백업 멤버

신종석은 1998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4순위로 원주 나래(현 원주 DB)에 입단했다. 193cm의 작지 않은 키에 슈팅 능력과 수비력을 겸비한 슈터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당시 동기들이 너무 짱짱했다. 1순위로 선발된 현주엽(전 창원 LG 감독)과 2순위로 선발된 윤영필(전 안양 SBS), 신기성(현 SPOTV 해설위원)과 고(故) 표명일(양정고 코치) 등 지금도 언급되는 선수들이 당시에 존재감을 보여줬다.
신종석은 데뷔 시즌(1998~1999)부터 4시즌 동안 평균 15분 내외를 소화했다.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 못했다. 적어도, 2001~2002 시즌까지는 그저 그런 백업 멤버에 불과했다.

1998 드래프트에서 원주 나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당시 드래프트는 KBL에서 실시한 최초의 드래프트였는데요.
가문의 영광이었어요.(웃음) 프로 구단에 선발된다는 것 자체가 쉬운 게 아니기에 기분이 좋았고, 가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무감과 책임감도 강했습니다.
선수 생활을 거의 식스맨으로 지냈습니다. 컨디션을 다잡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백업 자원들은 워밍업 후 벤치에 앉아있습니다. 선발 선수들과 함께 몸을 풀어도, 몸이 다시 굳어버리죠. 그렇게 벤치에 있다가, 코트로 다시 나가는 건 어렵습니다. 이건 아마 벤치 멤버를 경험한 모든 선수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운이 좋았어요. 좋은 선배님들 그리고 좋은 선수들과 뛰었거든요. 수비나 궂은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출전 기회도 자연스럽게 많아졌습니다. 궂은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선수들과 뛰다 보니, 득점 기회도 많았던 것 같고요.
중첩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코트에 나가면 어떤 것부터 하려고 하셨나요?
말씀드렸듯이, 수비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저희 팀에 득점력 좋은 선수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수비에 더 플러스가 되고 싶었어요. 수비를 적극적으로 하다 보니, 공격에서의 움직임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것 같아요.

2003년 4월 13일, 대구실내체육관
프로 선수들과 인터뷰를 하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기회가 한 번은 올 거라고 본다. 주어진 기회를 잘 잡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신종석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2002~2003 시즌 챔피언 결정전 6차전이 그랬다.
2003년 4월 13일, 대구실내체육관. TG는 당시 대구 동양 오리온스(현 고양 오리온)에 3-24로 밀렸다. 1쿼터였다고는 하나, TG 벤치와 선수들, 농구 팬들 모두 ‘챔피언 결정전 7차전’을 생각했다. 그 정도로, TG의 상태가 절망적이었다.
당시 TG 사령탑이었던 전창진 감독(현 전주 KCC 감독)은 더더욱 7차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식스맨 위주로 2쿼터를 운영했다. 신종석 역시 팀의 방향에 맞게 코트로 나갔다.
그러나 신종석은 주변의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2쿼터에만 3점 5개를 모두 성공. 신종석이 2쿼터에만 17점을 퍼부었고, TG는 동양과 동점(36-36)으로 전반전을 마쳤다. 신종석의 활약에 힘입어 후반에 집중력을 발휘했고, 67-63으로 역전승했다. 4승 2패로 적지인 대구에서 기적 같은 우승을 만들었다. 신종석 역시 KBL 역사에 획을 그은 이가 됐다.

TG가 2002~2003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습니다. 이전 시즌과 차이점은 어떤 거였을까요?
이전 시즌에도 열심히 싸웠습니다. 그렇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아쉽게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2002~2003 시즌이 되기 전에, 김주성(현 원주 DB 코치)이 신인으로 들어왔습니다. 원래 앞선 자원과 포워드가 좋았는데, 골밑도 안정이 됐죠. 팀이 더욱 강해졌고, 선수들 또한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보여줬습니다. 그게 이전과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챔피언 결정전 상대는 대구 동양 오리온스였습니다. 김승현-김병철(현 고양 오리온 코치)-전희철(현 서울 SK 감독)-마르커스 힉스 등을 보유한 강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TG삼보가 5차전까지 3승 2패로 우위를 점했습니다.
동양이 2001~2002 시즌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2002~2003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도 저희보다 우위에 있을 거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팀원들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멤버 구성상 크게 밀리지 않았고, 선수들 모두 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거든요. 특히,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수들 전체의 마음가짐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그리고 6차전이 됐습니다. 1쿼터 결과(3-24)는 처참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 ‘선수 신종석’의 존재감을 팬들에게 제대로 각인시켰습니다.
1쿼터 끝나고 나서, 다들 “끝난 게임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저 같은 식스맨들한테는 기회였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코트에 갈 수 있었거든요. 밑질 것도 없었고요.
편한 마음으로 임하다 보니, 공격과 수비 모두 잘된 것 같아요. 2개의 3점을 넣을 때까지는 그냥 “들어가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3번째부터는 달랐어요. 운이 따른다고 느꼈죠.(웃음) 그렇지만 평소에 경기를 많이 뛰지 않는 선수이다 보니, 3쿼터에는 체력이 떨어지더라고요. 3쿼터에는 팀에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그래도 후회 없이 했고, 우승에 보탬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식스맨들이 2쿼터에 잘 버텨줬고, 주전 선수들이 이를 발판으로 후반전에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극적인 결과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역전승 그리고 첫 우승이었습니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어요. 그 때의 뿌듯함 그리고 그 때 얻었던 자신감이 아직도 생각날 정도입니다.

FA 그리고 은퇴
신종석은 2004~2005 시즌 원주에서 한 번의 우승 반지를 더 획득했다. 그리고 2005~2006 시즌 종료 후 FA(자유계약)를 선언했다. 전년도보다 43% 오른 1억 5천만 원의 보수 총액으로 2006~2007 시즌을 시작했다. 행선지는 안양 KT&G 카이츠.(현 안양 KGC인삼공사)
그러나 안양에서 뛴 시간은 길지 않았다. 2007~2008 시즌에는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로 임대됐고, 2008~2009 시즌 전 좋지 않은 몸 상태로 인해 은퇴했다. KBL에서 정규리그 429경기를 뛴 신종석은 곧바로 KT&G의 전력분석원 겸 스카우터가 됐다. 그렇게 선수로서의 인생을 마무리했다.

2004~2005 시즌 때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003~2004 시즌에 전주 KCC한테 우승 트로피를 내줬습니다.(원주 TG삼보는 당시 40승 14패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 3승 4패로 통합 우승을 실패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4~2005 시즌에는 KCC를 또 한 번 결승전에서 만났습니다. 2002~2003 시즌처럼 ‘지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또, 입단 동기인 신기성 위원이 상무 제대 후 처음으로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습니다. 저희한테 동기 부여가 됐죠. 강기중도 신기성 위원의 백업 역할을 잘 해줬고, 그런 게 저희한테 긍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2008~2009 시즌에는 기록이 아예 없습니다.
2005~2006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KT&G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KT&G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1년차인 2006~2007 시즌에는 경기를 뛰었습니다.(당시 50경기에 나섰고, 평균 12분 52초를 소화했다) 2년차인 2007~2008 시즌 때부터는 몸이 좋지 않았고, 황진원 선수가 부산 KTF에서 트레이드로 합류했습니다. 저랑 포지션이 겹쳤고, 저는 KT&G에서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임대 선수 자격으로 모비스에서 뛰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 몸이 좋지 않았고, 웨이버로 공시됐습니다. 그리고 은퇴를 했죠.
모든 선수가 그렇듯, ‘은퇴’라는 단어가 복합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아요.
은퇴하는 선수들 모두 ‘은퇴 시기’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언제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몸에 이상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은퇴를 해야 했죠. 그런 제 몸 상태를 구단에도 말씀드렸고요.
사실 KT&G에서 저에게 좋은 기회를 줬습니다. FA가 된 저한테 좋은 조건을 제시했죠. 그렇지만 저는 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은퇴했어요. 그런 점이 아쉬움으로 남더라고요.

‘농구’가 가르쳐준 것
프로 생활을 마친 신종석은 2010년 6월부터 경복고등학교 코치가 됐다. 전준범-박재현(이상 전주 KCC)-주지훈(인천 신한은행 인스트럭터)-문성곤(안양 KGC인삼공사)-이종현(고양 오리온)-최준용(서울 SK) 등 정상급 선수들과 함께, 모교인 경복고를 고교 최강 팀으로 올려놓았다. 2017년 12월까지 모교 제자들과 함께 했다.
그 후에는 군산고와 양정고에서 학생 선수들을 지도했다. 2019년부터 인헌고등학교의 코치를 맡고 있다. 경복고 시절만큼의 전력은 아니지만, ‘즐겁고 재미있는 농구’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농구’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행보를 걸었던 신종석이다. ‘농구’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었다. ‘농구’를 통해 인생의 핵심 가치를 배우기도 했다. 그가 언급한 핵심 가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2010년 6월부터 경복고 코치를 맡으셨습니다.
당시 유도훈 감독님(현 대구 한국가스공사 감독)과 이상범 코치님(현 원주 DB 감독)께서 저를 KT&G의 스카우터이자 전력분석원으로 활용하셨습니다. 저는 2009~2010 시즌 종료될 때까지 KT&G에 있었습니다.
그 때 ‘경복고 코치가 공석이 될 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교 코치를 하고 있던 후배가 개인 사정으로 사퇴를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이상범 감독님(2008~2009 시즌부터 감독대행이 됐고, 2009~2010 시즌부터 KT&G의 정식 감독이 됐다)한테 사정을 말씀드렸어요. 흔쾌히 허락해주셨어요. 그리고 2010년 6월부터 경복고 코치를 시작했습니다.
경복고를 고교 무대 최강으로 올려놨습니다.
과찬이십니다.(웃음) 사실 제가 들어갈 때, 좋은 선수들이 이미 많았어요. 그 선수들을 보고 입학하겠다는 후배들도 많았고요. 선수들이 잘했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경복고가 좋은 결과를 냈다고 생각해요.
2017년 12월에 경복고 코치에서 물러났습니다.
경복고 코치를 그만둔 후, 2개월 정도 야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군산고에 계셨던 오세일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지도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했습니다.
1년 8개월에서 10개월 정도 군산고 선수들을 지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셋째 아이가 태어났어요. 기러기 아빠가 되다 보니, 집사람도 아이들도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정을 말씀드리고, 군산고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후에는 3~4개월 정도 야인 생활을 했고, 양정고에서 1년 동안 어시스턴트 코치를 했습니다. 그 후 2019년부터 지금까지 인헌고 코치를 맡고 있어요.
10년 넘게 학생 선수들을 지도했습니다. 어떤 점에 중점을 맞춰 지도를 하셨나요?
경복고는 멤버가 짜여있었습니다. 좋은 멤버와 함께 우승을 많이 했죠. 기분이 좋았고, 뿌듯함도 컸어요. 그렇지만 각자 개성이 뚜렷해서, 거기에 맞춰 지도한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학생 선수들을 지도하다가, 어느 순간 떠오른 말이 있었습니다. 이상범 감독님께서 이야기하셨던 “즐겁고 재미있게 농구하자”였어요.
그걸 마음 속에 되새기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저희 아이들한테도 “최선을 다하고 지면 후회는 없을 것이다. 상대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사기와 의욕은 잃지 말자”고 강조하고 있어요.
또,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가르치려고 해요. 그걸 주위에서 좋게 봐주시고 계세요. 아이들을 향한 평가도 이전보다 좋아졌고요. 물론, 저희 선수들의 실력은 여전히 부족하고 학교의 성적도 부족하지만, 저는 지금 이 순간을 더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어요.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신다면?
제 인생이 아직 진행형이기는 하지만, 저는 농구를 선택해서 후회 없이 선수 생활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저의 자산이 되고 있고요.
또, 농구라는 단체 운동을 하면서 ‘배려’라는 요소를 깨달았습니다. 저 자신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도 중요하다는 걸 느꼈죠. 여러모로, 농구를 잘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농구’는 신종석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배려와 단체 생활 등 저를 일깨워준 존재라고 생각해요.
‘선수 신종석’을 추억으로 삼는 팬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서두에도 말씀 드렸듯, 제가 과연 인터뷰를 해도 되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신종석은 본지와 인터뷰를 시작할 때, “저 같은 사람이 인터뷰를 해도 될까요?”라는 말을 기자에게 던졌다) 제가 그 정도의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서요.(웃음)
그래도 확실한 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가진 역량에 비해, 과분한 인기를 얻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저에게 연락을 주시는 팬들도 가끔 계시고요. 그런 점들이 아직도 감사해요.
‘코로나 19’라는 시국이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데, 팬 여러분들 모두 지금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농구가 침체됐다는 이야기도 많은데, 경기장에 많이 찾아주셔서 응원과 격려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본문 첫 번째 그림)
사진 = KBL 제공, 신종석 제공(본문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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