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우직하고 성실했던 빅맨, 김재훈 전 울산 현대모비스 코치

손동환 기자 / 기사승인 : 2021-09-28 09: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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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8월호에 게재됐습니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농구는 ‘에이스의 득점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축구나 핸드볼 등 다른 단체 구기 종목에 비해, 1대1로 득점할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5명의 조화 없이, 1대1은 통하지 않는다. 에이스의 1대1이 통하려면, 나머지 4명이 팀 플레이를 해야 한다. 에이스가 빛나기 위해, 에이스를 빛나게 할 조연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김재훈(전 울산 현대모비스 코치)은 그런 사람이었다. 팀을 위한 플레이를 할 줄 아는 이였다. 우직하고 성실한 플레이를 할 줄 알았다. 그래서 김재훈은 현역 시절 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07~2008 시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김재훈은 2017~2018 시즌까지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에서 코치를 했다. 그리고 야인이 됐다. 야인이 된 그는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말로 인터뷰 마지막을 장식했다.(본 인터뷰는 2021년 7월 7일 오후 2시에 진행됐다)

선수 김재훈은?

용산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김재훈은 190cm 내외의 빅맨이다. 빅맨으로서 높이와 운동 능력을 갖춘 건 아니었지만, 터프함과 단단함, 부드러움을 겸비한 선수였다.
화려하거나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연세대의 황금기에 꼭 언급되는 선수였다. 궂은 일을 잘하고, 득점할 때는 득점도 해줬다. 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줄 아는 선수였다.
연세대학교 졸업 후 현대전자에 입단한 김재훈은 농구대잔치 주역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KBL이 생긴 후에는 대전 현대 다이냇에서 두 번의 우승(1997~1998, 1998~1999)을 차지했다.
여러 팀을 떠돌다가, 2005~2006 시즌부터 선수 시절 마지막까지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에서 뛰었다. 식스맨으로서 2005~2006 시즌 정규리그 1위와 2006~2007 시즌 통합 우승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김재훈은 KBL 입성 후 정규리그 391경기와 플레이오프 52경기에 나섰다. 정규리그 통산 평균 12분 12초 동안 4.0점 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2007~2008 시즌 종료 후 ‘선수 김재훈’이라는 타이틀은 사라졌다.

연세대학교와 현대전자 시절의 김재훈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학교 때만 해도, 농구가 큰 붐을 일으켰습니다. 그야말로 농구가 화려했던 시기였습니다. 저 역시 그 시절을 뛰었던 선수로서 많은 혜택을 누렸습니다. 대학 때는 정말 즐겁게 운동하고, 즐겁게 시합했던 것 같아요.
대학 동기인 문경은(현 서울 SK 기술자문)과 제가 현대전자와 삼성전자로 갈라져야 했습니다. 당시 최희암 연세대 감독님(현 고려용접봉 부회장)께서 저희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주셨습니다. 저와 (문)경은이가 대학교 3학년 때 진로가 결정됐고, 저는 현대전자로 경은이는 삼성전자로 갔습니다.
현대전자는 당시 삼성전자랑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저희가 만약 삼성전자를 이기면, 고(故) 정주영 회장님께서 격려금도 주고 많은 포상을 주셨습니다. 삼성전자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라이벌 관계 때문인지, 두 팀 모두 그 시합에 비중을 크게 뒀던 것 같습니다.
선수 김재훈의 강점과 단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팀 플레이를 잘했던 것 같아요. 화려하거나 특출한 플레이를 한 건 아니었지만, 우직한 플레이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궂은 일과 이타적인 플레이를 하면서 득점도 어느 정도 했기에, 저를 가르쳤던 감독님들께서 저를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웃음) 반대로, 욕심을 너무 안 부린 게 ‘선수 김재훈’의 단점이라고 생각해요.
현역 시절 코너에서 쏘는 페이더웨이가 정확했던 걸로 기억납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새벽 4시에 첫 차를 타고 학교에 갔습니다. 오전 훈련할 때까지 슛 연습을 했어요. 그러면서 슛이 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제 슛 연습을 매일 도와주셨습니다. 제 볼을 잡아주려고 첫 차를 같이 타셨죠. 아버지께서 정말 고생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가 없었다면, 제가 그렇게 꾸준히 연습을 못했을 거예요.
아쉬운 게 하나 있었습니다. 키가 너무 작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무릎에 성장통이 왔습니다. 그 때 어느 정도 쉬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의 용산고등학교는 성장통으로 쉬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성장통이 왔을 때 좀 쉬었다면, 2m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웃음) 용산중학교와 용산고등학교에서 기본기를 너무 잘 배웠지만, 키만큼은 너무 아쉬웠어요.(웃음)
KBL로 전환된 후, 외국 선수들이 합류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처럼 코트에 긴 시간 나서기 힘들어졌습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유재학 감독님(현 울산 현대모비스 감독)께서 저희 학교 코치로 오셨습니다. 감독님께서 그 때 ‘너는 슛도 좋고 다 좋은데, 돌파가 너무 부족하다. 돌파 기술을 연습해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감독님의 말씀을 깊게 듣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때만 해도, 센터가 굳이 돌파 연습을 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돌이켜보면, ‘내가 그 때 감독님 말씀을 들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많이 듭니다.
제가 그 때부터 돌파 연습을 많이 했다면, 포지션을 더 빨리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됐다면, 외국 선수가 왔어도, 제 출전 시간이 줄어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무래도 우승할 때죠. KBL 초창기에 현대에서 2연패(1997~1998, 1998~1999)를 했고, 모비스의 첫 우승(2006~2007)을 선수로서 함께 했습니다.
그 경험이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수 때 우승했던 경험이 코치를 할 때도 이어졌거든요. 저는 코치로서도 4번을 우승했습니다. 선수와 코치를 합치면, 도합 7번을 우승한 거죠.
우승 경력만 놓고 보면, 역대 감독님-코치님-선수들 모두 포함해도 상위권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수 김재훈’은 개인적으로 대단하지 않았지만, 우승 경력 하나만큼은 아직도 자부심으로 남아있습니다.

은퇴 그리고 제2의 인생
모든 프로 스포츠 선수들이 피해갈 수 없는 게 있다. ‘은퇴’다. 아무리 건강했고 아무리 기량이 좋았던 선수여도, 선수 인생의 끝에는 ‘은퇴’라는 단어와 마주한다.
김재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행인 게 있었다. 선수 은퇴 직후 코치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치’의 임무는 만만치 않았다. 선수와는 다른 세계관으로 코트를 바라봐야 했기 때문이다.

2007~2008 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허리가 너무 아팠어요. 디스크가 온 거죠. 뛸 수 없는 몸이 됐습니다. 그렇지만 운 좋게 코치로 임명됐어요. 감독님께서 ‘선수들을 관리하면서 지도자 경험을 쌓자’고 하셨거든요.
코치와 선수의 차이는 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너무 많이 달랐습니다. 선수들은 자기 관리만 잘 하면 됐는데, 코치는 해야 할 게 많았습니다. 선수들과 감독님, 다른 코칭스태프의 성향도 파악해야 했습니다. 코치 초창기에는 노하우가 쌓일 시기가 아니었기에,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어떤 게 제일 어려우셨나요?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도 어려웠지만, 당시 유재학 감독님과 임근배 수석코치님(현 WKBL 용인 삼성생명 감독)께서 지닌 운영 방향을 파악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또, 경험이 없다 보니, 코치로서의 역할에 녹아들지 못했습니다. 선수와 코칭스태프의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니, 혼란스러웠습니다. 선수도 코치도 아닌 느낌이었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셨나요?
감독님께서 어떤 걸 원하시는지 옆에서 보고 캐치하려고 했고, 패턴-전술-선수들의 성향 등을 스스로 공부해야 했습니다. 많은 공부와 고민이 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잠도 거의 안 잤던 것 같아요.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선수로서 느낀 유재학 감독님과 코치로서 느낀 유재학 감독님은 어떤 게 달랐나요?
선수 때 봐도 그렇고 코치 때 봐도 그렇고, 꾸준하고 기복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감독님을 더 믿게 됐고, 감독님을 더 신뢰하게 됐습니다. 차이가 없으셨기에, 코치로서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코치 김재훈, 그가 누린 영광의 순간들
2012~2013 시즌 종료 후, 모비스의 수석코치가 공석이었다. 당시 임근배 수석코치가 아내의 병간호 때문에 팀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메워야 했다.
막내 코치였던 김재훈이 수석코치로 승진했다. 급작스런 승진. 부담감이 컸다. 하지만 수석코치 부임 후, 2014 윌리엄존스컵 우승과 팀의 PO 3연패라는 영광을 누렸다. 코치로서도 ‘우승 DNA’를 제대로 보여줬다.
김재훈은 “운이 좋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코치가 된 후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우승’이라는 행운을 누릴 수 없었다. 선수 시절처럼 우직하게 달렸기에, 코치로서도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수석코치로 부임했습니다. 급작스러운 일이었는데요.
부담감이 컸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았어요. 여러 가지가 잘 맞았고, 수석코치로 부임한 첫 시즌(2013~2014)에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감독님께서 시스템을 워낙 잘 구축하셨습니다. 시즌을 준비하는 큰 틀이 다르지 않았기에,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모두 혼란 없이 시즌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감독님께서 큰 틀을 너무 잘 잡아주셨기에, 저 역시 수석코치로서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팀 전체적으로도 준비가 됐기에, 저희가 변수에 잘 대처할 수 있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강호로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014 윌리엄존스컵 우승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모비스는 2013~2014 시즌 챔피언 결정전 우승으로 2014 윌리엄존스컵 출전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유재학 감독과 양동근이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준비로 대표팀에 차출됐고, 박종천-천대현-이대성 등은 부상으로 국내에 잔류했다. 외국 선수 또한 리카르도 라틀리프(현 라건아) 한 명이었다. 라틀리프를 포함한 8명의 선수만이 대회 엔트리에 포함됐고, 박구영과 김종근은 100% 컨디션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인으로 합류한 김영현은 곧바로 실전에 나서기 어려웠다)

8월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수들이 몸을 만들어서 시합을 나가야 하는데, 뛸 수 있는 선수가 1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식스맨급 선수가 대부분이었고, 외국 선수도 1명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에는 6~7명 정도의 선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체를 하려고 벤치를 보니, 선수가 없더라고요.(웃음)
그런데 날씨도 덥고, 음식 또한 선수들 입맛에 맞지 않았어요. 일정 역시 너무 빡빡했습니다. 9일 동안 9경기를 했던 걸로 기억해요. 선수들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전술에 관련된 걸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선수들에게 경기 경험을 잘 쌓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선수들이 경기를 할수록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고, 경기 집중력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우승을 했던 것 같아요. 선수들 기량도 그 때 확 늘었고요. 하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어우...(웃음)
그 소식을 들은 유재학 감독님께서 “기적이다”는 찬사를 남기셨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지만, 감독님께서 큰 틀을 너무 잘 잡아주셨습니다. 저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편하게 해주셨습니다. 부담은 많이 됐지만, 마음껏 해볼 수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너무 잘 따라줬고, 저도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비스는 2014~2015 시즌 통합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KBL 최초로 PO 3연패를 기록한 팀이 됐습니다.
시즌 개막 전 윌리엄존스컵에서 우승을 하고, 통합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감독님께서 큰 틀을 잡아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예요. 그렇지만 저 또한 비시즌 준비를 거의 혼자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뿌듯했던 것 같아요. 뿌듯함의 크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고요.

아쉬움 그리고 그리움
김재훈 코치는 모비스에서 10년 넘게 지도자 생활을 했다. 하지만 2017~2018 시즌 종료 후 야인이 됐다. 야인이 된 김재훈은 프로농구와 팬들의 곁을 3년 넘게 떠나있었다.
KBL은 아니지만, 코트에 복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산됐다. 그래서 아쉬움이 커보였다. 동시에, 코트를 향한 그리움도 더 커졌다. 팬들에게 받았던 사랑 또한 잊지 않고 있었다.

2017~2018 시즌 종료 후 모비스를 떠났습니다. 아쉬움이 컸을 것 같은데요.
선수 시절 어려움을 겪었을 때, 유재학 감독님한테 ‘모비스로 가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감독님께서 그런 저를 받아주셨고, 저는 식스맨으로서 우승을 경험했습니다. 코치로서도 우승 트로피를 만질 수 있었습니다.
모비스는 저에게 많은 의미를 주는 팀입니다. 제 농구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해준 팀이자 고향 같은 팀이죠. 그래서 모비스를 떠날 때, 아쉬움이 컸습니다.(웃음) 그렇지만 제가 부족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비스를 떠난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그만두고 나서, 송파에 피자 펍을 차렸습니다. 별명과 연관해서 ‘더 빅’이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시작했죠.(웃음) 피자와 치킨 등 안주거리와 맥주를 팔았습니다.
제가 주방에서 직접 요리를 했습니다. 선수 때부터 요리하는 걸 좋아했고, 유튜브에 나온 영상을 보며 조리법을 익혔습니다. 재료도 A급으로 썼고, 토핑 또한 넘치도록 올렸습니다. 한 미국인 손님께서는 ‘미국 피자 같다’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기도 했습니다.(웃음)
그러다가 2019년 10월에 인도네시아 실업팀에서 감독 제의를 받았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고민 끝에 가게를 결국 접었죠.
비행기 표도 사놓고 인도네시아에 갈 준비를 다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타기 1주일 전에, 인도네시아 팀에서 갑자기 자격증을 이야기하더라고요. FIBA에서 나오는 지도자 자격증 같은 게 있는데, 그걸 준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 자격증을 갖추지 못했어요. 자격증을 취득할 시간도 촉박했고요. 그러면서 인도네시아행을 포기했습니다. 피자 가게도 정리했는데... 그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쉬었어요. 아무 것도 안 하고 쉰다는 게 어렵더라고요.(웃음)
농구가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너무 그리워요. 특히, 시즌 때 더 그런 것 같아요. TV로 경기들을 보면, ‘나도 저기 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팬들도 ‘김재훈’이라는 인물을 많이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은 농구계를 떠나있지만, ‘농구인’으로서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농구가 어떻게 하면 발전할 수 있고, 팬들과 어떻게 하면 진정한 교감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모비스를 갑작스럽게 떠났습니다. 팬들한테 인사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어요. 그 점은 아직도 팬들에게 죄송합니다. 제가 비록 급작스럽게 떠났지만, 언젠가 복귀하게 된다면, 팬 여러분의 많은 사랑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 손동환 기자,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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