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묵직했던 만큼 대단한 존재감 선보인 나이젤 딕슨

이재승 기자 / 기사승인 : 2022-02-08 10: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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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12월 하순에 작성했으며,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2년 1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프로농구를 호령한 여러 센터가 있었으나 육중한 체구를 과시한 ‘Big Jelly’ 나이젤 딕슨과 같은 선수는 없었다. 그는 KBL에서 대체선수로 합류한 두 번을 더해 약 2년 정도를 뛴 것이 전부였으나, 영향력은 여는 선수 못지않았다. 지난 2006년에는 KBL 대표로 한중 올스타전에 출격해 KBL 올스타의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딕슨은 주로 부산 KTF(현 수원 KT)에서 뛰었으며, 안양 KGC인삼공사와 서울 삼성을 거쳤다. 딕슨의 대학 시절과 한국에서 뛰었던 시간을 되돌아봤다. 그는 KT를 대표하는 외국 선수였던 애런 맥기, 제스퍼 존슨과 모두 함께 뛴 경험도 있다.


녹록치 않았던 대학 시절
딕슨은 고교 졸업 후 ACC(Atlantic Coast Conference)의 최고 명문이라 할 수 있는 플로리다주립대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1999-2000 NCAA 첫 해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좋은 팀이있던 만큼, 플로리다스테이트 세미놀스에는 출중한 선수가 많았다. 28경기에 나서면서 꾸준히 출전은 했으나 출전 시간이 극히 적었으며, 많은 활약을 펼치기 쉽지 않았다. 그는 경기당 6.4분을 소화한 것이 전부였으며 1.8점(.426 .--- .417) 2.1리바운드에 그쳤다. 그러나 그는 해가 갈수록 조금씩 나아졌다. 주전 자리도 꿰차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평균 출전 시간이 늘었다. 평균 14.7분을 뛰며 6.7점(.484 .--- .457) 5리바운드를 올리면서 백업 센터로 자리를 잡았다. 3학년인 지난 2001-2022 시즌에는 28경기에서 경기당 17.6분 동안 8.1점(.494 .--- .495) 6.4리바운드를 올렸다. 그러나 기록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유투는 여전히 저조했으며, 투박한 기술로 인해 NCAA 1부에서 당장 많은 활약을 펼치기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3학년을 마친 후 큰 결단을 내렸다. 꾸준히 주전 센터로 나섰지만, 주도적인 농구를 펼치기 어려웠던 만큼 학교를 옮기기로 한 것. 플로리다에서 세 시즌을 보내면서 평균 20분 이상을 뛴 적이 없었기 때문. 대학을 넘어 당연히 프로에서 선수생활을 하고자 했던 그는 좀 더 많은 시간을 뛰며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NCAA에서는 전학할 시에 한 시즌 동안 뛸 수 없다. 딕슨은 이를 감수하교 플로리다를 떠나기로 했다.
 

그는 선벨트컨퍼런스(SBC)의 웨스턴켄터키 힐타퍼스(현 C-USA 소속)로 향했다. 한 시즌 동안 실전 경기에 나서진 못했으나 기량 연마에 나섰다. 웨스턴켄터키는 직전 시즌 NCAA 토너먼트에 나서는 등 가능성을 보인 만큼, 딕슨이 활약하면서 2년 연속 토너먼트에 나설 경우 자신을 보다 확실하게 알릴 수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처음으로 28경기에서 모두 주전으로 출장했다. 경기당 25.1분을 소화하며 15.9점(.678 .--- .433) 10.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대학 진학 이후 처음으로 평균 20분 이상을 뛰면서 나은 모습을 보였다. 상대적으로 약한 팀이었지만 그의 활약이 좀 더 돋보일 수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린 것은 물론, 평균 ‘15-10’을 기록하면서 센터로서 안정감을 선보였다. 평균 득점은 선벨트에서 5번째로 많았으며, 평균 리바운드 1위, 자유투 시도 2위, 필드골 성공률 1위를 자랑했다. 공격 기여도와 승리 기여도에서 단연 높은 수치를 뽐내면서, 딕슨은 웨스턴켄터키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높은 필드골 성공률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가 플로리다에서 뛸 때보다 적수가 많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며, 아무래도 ACC에서 뛸 때보다 SBC에서 골밑 공략이 상대적으로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그는 무려 70%에 육박하는 필드골 성공률을 자랑하며 대학 무대에서 정통 센터로 입지를 보다 확실하게 다질 수 있었다. 좋은 활약을 펼쳤던 그는 올-선벨트 퍼스트팀에 호명이 됐다. 올 해의 새로 가세한 선수(신입생+전학생)에도 선정이 되는 등 굵직한 수상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전학하면서 한 시즌 동안 뛰지 못하면서 대학 졸업이 늦어졌고, 이로 인해 프로 진출에도 영향을 여러모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딕슨이 뛰었던 지난 2003-2004 시즌에 웨스턴켄터키가 토너먼트에 나서지 못하면서 딕슨이 좀 더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잡지 못한 부분은 뼈아팠다. 직전 시즌까지 웨스턴켄터키는 컨퍼런스 내 지구 우승, 컨퍼런스 정규시즌 우승, 컨퍼런스 토너먼트 우승을 모두 차지했다. 당연히 NCAA 토너먼트에 나섰으나, 딕슨과 함께 할 때는 지역 우승과 토너먼트 진출에 다가서지 못했다.

쉽지 않았던 NBA 도전
대학을 마친 그는 당연히 NBA 진출을 희망했다. 그는 2004 NBA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2004년에는 직전 해인 2003년과 달리 돋보일 만한 확실한 유망주가 많지 않았다. 드와이트 하워드(레이커스)가 고교 출신으로 각광을 받은 가운데 울산 현대모비스에서 뛴 바 있는 에메카 오카포가 유력한 1순위 후보로 관심을 모았다. 다만, 2003년과 달리 빅맨 쪽에 상당한 경쟁자가 많았던 만큼, 딕슨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장 대비 힘은 확실해 몸싸움에서 이점을 가질 만하나 신장 대비 체중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만큼 기동력에서 제약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NBA 다른 구단도 이를 절대 간과하지 않았을 터. 게다가 NBA는 NCAA에 비해 탁월한 운동 능력과 빠른 공수 전환이 필요했기에 딕슨의 가치가 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끝내 그의 이름은 60명 이내에 호명이 되지 않았다. 당시 샬럿 밥캐츠(현 호네츠)가 신생 구단으로 자리하면서 NBA는 종전 29개 구단 체제에서 30개 구단으로 자리하게 됐다. 신인급이나 다른 팀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선수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딕슨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곧바로 구단과 접촉 해 계약을 끌어내야 했다. 대개의 경우, 서머리그를 거치면서 가능할 경우에 트레이닝캠프에서 뛰는 조건으로 합류한다. 캠프 계약을 통해 생존하면 프리시즌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프리시즌 명단에 들어갔다고 해서 정규시즌에 추려야 하는 15인에 모두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시범경기에서 많이 뛸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우선, 딕슨은 2004-2005 시즌 개막을 앞두고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와 캠프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지난 2003-2004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고 2연패 도전에 나서고 있었다. 벤 월러스, 라쉬드 월러스, 테이션 프린스, 리처드 해밀턴, 천시 빌럽스로 이어지는 주전 전력이 막강했다. 문제는 디트로이트의 골밑 전력이 여전히 탄탄했다. 두 명의 월러스 외에도 벤치에 앤토니오 맥다이스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 비록 당시 벤치에 있던 메멧 오쿠어가 유타 재즈로 이적했지만, 2003 드래프트에서 놀랍게도 제임스에 이어 2순위로 지명한 유망주였던 다르코 밀리시치도 자리하고 있었다. 즉, 여러모로 신인이 디트로이트 인사이드에서 뛸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어려웠다. 다만, 디트로이트도 유사시를 대비해야 하고 선수단을 채워야 했기에 다른 선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 때 딕슨이 디트로이트의 레이더에 포착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규시즌 개막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방출을 당했다. 디트로이트는 정규시즌 선수단 추리기에 나섰고 먼저 딕슨을 정리해야 했다. 그는 계약한 지 만 20일을 채우지 못하고 디트로이트를 떠나야 했다. 디트로이트에서 생존하지 못했지만, 또 다른 기회가 있었다. 덴버 너기츠가 관심을 보인 것. 당시 덴버는 카멜로 앤써니(레이커스)를 중심으로 팀을 꾸려가고 있었기에 빅맨 보강이 필요했다. 심지어 덴버는 딕슨에게 다년 계약을 안겼다. 대개 시즌 전에 어렵사리 합류하는 선수의 경우 다년 계약이긴 하나 보장되지 않는 조건이 태반인 만큼, 실질적으로 다년 계약이라 정의하긴 어렵다. 그러나 활약 여하에 따라 이후까지 뛸 수도 있는 만큼, 그에게는 좋은 기회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가 됐다.
 

그러나 덴버도 전력을 추리는 과정에서 딕슨과 함께할 수 없었다. 골밑에서 존재감은 대단했지만, 기술적인 측면과 기동력에서 안게 되는 단점이 도드라졌다. NBA의 공수 전환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 상대 빅맨과의 힘에서 밀리지 않으나 기술에서 격차가 컸던 부분이 결정적이었다. 결국, 그는 방출을 피하지 못했다. 덴버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은 이후 더는 NBA와 간접적인 인연조차 맺지 못했다. 이후 그는 D-리그(현 G리그)에서 뛸 기회를 잡았다. 지난 2005 D-리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순위로 지명이 됐다. 프로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 D-리그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 그는 2007년에 신생팀인 리오그란데벨리 바이퍼스가 창단될 때 확장 드래프트로 새로운 팀으로 향했다. G-리그의 경우 드래프트가 다소 무색할 수 있으나 꾸준히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NBA는 아니지만, 미국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부족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시작된 KBL 진출

D-리그에서 좀 더 뛸 수 있었으나 그는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뛰게 됐다. KBL 진출 전에는 유럽에서 몸을 담기도 했다. 그리스리그에서 11경기에서 평균 4.1점 4.8리바운드에 그쳤다. 유럽 무대를 누비는 여느 미국 선수만큼 활약하지 못했기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KBL은 지난 2004-2005 시즌부터 외국 선수 영입을 기존 드래프트가 아닌 자유계약으로 바꾸면서 수준급 선수들이 건너오고 있었다. 이 때 부산 KTF(현 수원 KT)의 추일승 감독은 지난 2004-2005 시즌에 애런 맥기, 게이브 미나케와 계약하면서 KTF를 강호로 끌어올렸다. 이후 국내 선수 이적과 외국 선수 부진이 겹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마크 샐리어스를 대신해 딕슨을 영입하기로 했다. 직전 시즌 함께 했던 미나케는 맥기와 함께하기 충분했고, 리그에서 정상급 기량으로 손꼽혔다. 하지만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당한 부상과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인해 관리가 어려웠던 만큼, 그 대신 다른 선수를 택했다. 그러나 샐리어스의 부진으로 외국 선수 교체를 노렸던 KTF는 샐리어스를 방출하고, D-리그에서 뛰고 있던 딕슨을 불러들였다.
 

딕슨은 등장부터 많은 파란을 일으켰다. 대학 시절 호쾌한 덩크를 터트리며 골대를 부쉈던 영상이 알려지면서 많은 팬들이 관심을 가졌다. 엄청난 체중을 자랑하는 그가 어떤 모습을 선보일지 이목이 집중됐다. NBA에 샤킬 오닐이 있었다면, KBL에 딕슨이 공룡 센터로 위력을 떨칠 수 있을 지가 단연 주목이 됐다. 투박했지만 프로농구에서 적수를 찾기 쉽지 않았다. 그와의 몸싸움에서 실제로 다른 외국 선수들도 적잖이 버거워 했기 때문. 결정적으로 딕슨의 합류로 맥기가 부담을 내려놓았으며, 오히려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내외곽을 오갈 수 있었다. 당시 KTF는 현주엽의 이적으로 토종 선수층이 얇아졌기에 외국 선수 활약이 중요했다. 그나마 신기성을 영입하며 백코트 전력은 채워졌으나 전반적인 선수층이 얇았기 때문에 맥기와 딕슨의 역할은 당연히 중요했다. 이들이 팀 전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인 수준이었다. 당연히 뛰는 시간도 많았다.
 

그나마 KTF는 시즌 중 트레이드를 통해 황진원, 조상현, 이한권을 데려오면서 선수층을 보강했다. 당시 신인선수 드래프트는 시즌 중에 열렸고, KTF는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획득했다. 당시에는 방성윤이 참가한 드래프트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KTF는 미국 진출을 노리고 있는 방성윤 지명을 두고 고심했고, 지명권리를 트레이드하기로 했다. 방성윤의 지명권리, 정략영, 김기만을 보내고 황진원, 조상현, 이한권을 받았다. 당시 국내선수층이 유달리 취약했던 KTF로서는 당장 전력에 도움이 되는 선수들을 대거 불러들이면서 전력을 다졌다. 이만하면 새롭게 가세한 딕슨과 함께 플레이오프 진출을 넘어 높은 곳을 노리기 충분해 보였다.
 

딕슨은 국내 무대에 발을 들이자마자 안쪽을 확실하게 지배했다. 1월의 선수에도 선정이 되는 등 그야말로 광풍을 몰고 왔다. 딕슨과 함께할 때 맥기가 외곽에 자리하고 있고, 조상현과 신기성까지 좋은 외곽슛을 갖춘 이가 많았기에 다른 팀도 딕슨을 집중적으로 막기 어려웠다. 딕슨에게 도움 수비를 가한다면 외곽에서 다른 선수가 3점슛을 비롯해 공격 기회를 손쉽게 잡을 수 있었기 때문. 딕슨이 상대 집중 견제 대처가 유려한 편은 아니었지만, 공이 한 번 잘 돌아갈 시에는 KTF가 손쉽게 득점을 올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안쪽에서 힘이 단연 돋보였던 만큼, 골밑에서 상대 견제에도 불구하고 우격다짐으로 득점을 끝내 집어넣으면서 상대 수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자유투는 여전했다. 문제는 부상이었다. 그는 KTF에서 채 두 달을 채우지 못했다. 지난 2006년 2월 말에 열린 대구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한 것. KTF는 딕슨이 이탈하면서 골밑의 중심을 잃었다. 맥기가 이전처럼 안쪽에서 힘을 냈으나 한계가 있었다. KTF는 급한 데로 딕슨을 부상 공시하며 켄 존슨을 대체 선수로 영입했다. 하지만 존슨의 기량은 맥기와 딕슨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KTF는 리그 4위에 올랐으나 전주 KCC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무릎을 꿇었다. 지난 2005년에 이어 플레이오프 첫 관문에서 2년 연속 승전하지 못한 채 다소 무기력하게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안양을 거쳐 다시 부산으로
KTF에서 짧은 생활로 KBL과 인연을 맺은 그는 2009년에 다시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외국 선수 계약 방식이 다시 종전(드래프트) 방식으로 바뀌었고, 딕슨은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딕슨은 1라운드에서 8순위로 안양 KT&G(현 KGC인삼공사)에 지명이 됐다. 당시 KT&G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이상범 감독(DB 감독)이 딕슨을 통해 골밑을 다지고자 했다. 그가 KBL 외국선수 드래프트에 나선 것은 처음으로, 지난 2006년 이후 오랜 만에 한국 무대에서 뛰게 되면서 관심을 모았다. 외국 선수가 종전처럼 ‘2인 보유-2인 출전’이 아닌 ‘2인 보유-1인 출전’이었던 만큼 그가 오히려 위력을 떨칠 여지도 많았다. 이전처럼 기민하진 못했으나 안쪽에서 존재감은 여전했다. 그는 KT&G에서 17경기에 나섰다. 평균 17.5점 8.1리바운드로 이름값을 해냈다.
 

그런 그가 시즌 중에 트레이드가 됐다. 당시 부산 KT(현 수원 KT)는 제스퍼 존슨을 중심으로 리그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존슨을 중심으로 조성민, 박상오, 송영진이 제 몫을 해내면서 우승 도전에 나섰다. 이 때 KT는 KT&G와 트레이드에 나섰다. KT는 존슨의 백업인 도널드 리틀의 기량이 모자랐기에 센터 보강을 바랐다. 이에 리틀과 2010 1라운드 지명권을 내주는 대신 딕슨을 영입했다. 미래의 지명권을 활용해 현재의 전력 보강을 노린 대표적인 트레이드로 손꼽힌다. 해당 거래로 KT는 완벽한 외국 선수 전력을 구축했다. 존슨이 뛸 때 특유의 모션오펜스를 통해 토종 선수들과 공격을 풀어 나갔다. 존슨은 볼핸들링과 외곽슛을 갖추고 있었기에 수비를 끌어 모은 후 자신의 득점은 물론, 다른 선수도 잘 살렸다. 딕슨이 뛸 때는 안쪽에서 상대에게 밀리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선수 구성이 가능했다. 조성민의 성장과 박상오의 가세로 본격적인 탄력을 받았던 KT는 당시 유력한 우승 후보로 시즌 중에 급부상했다. KT는 구단 역사상 가장 돋보이는 외국 선수 진영을 구축했다.
 

하지만 KT는 플레이오프에서 한계를 보였다. 리그 2위에 올랐으나, 플레이오프를 넘어서지 못했다. KT의 상대는 1라운드를 통과한 KCC였다. 당시 KCC는 시즌 중에 외국 선수 트레이드를 단행해 부진한 마이카 브랜드를 보내고 테런스 레더를 영입했다. KCC는 레더와 아이반 존슨이라는 확실한 외국 선수 전력에 하승진과 전태풍을 필두로 추승균, 강병현, 임재현이 건재했다. 딕슨이 속한 KT는 KCC와의 준결승에서 1승 3패로 졌다. 시즌 후, KT&G는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를 손에 넣었다. 이어 KT의 지명권이 2순위가 된 것. KT는 직전 시즌에 단행한 트레이드로 지명 권리를 내줬다. KT&G는 해당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로 경희대학교의 박찬희(현 원주 DB)를 지명했고, 2순위로 연세대학교의 이정현(현 전주 KCC)을 차례로 불러들이면서 약했던 전력을 단숨에 보강했다(이듬해에 다시 1순위를 가져간 KGC는 오세근까지 호명하며 막강한 전력을 구축했다).
 

이후 딕슨은 재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다른 팀과의 계약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지난 2010-2011 시즌에 대체 선수로 서울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딕슨은 주로 벤치에서 출격했다. 삼성은 애런 헤인즈를 중심으로 전력을 꾸렸기 때문. 48경기에 나서면서 어김없이 꾸준히 코트를 밟았지만, 평균 12분 여를 뛰는데 그쳤으며 자연스레 기록도 하락했다. 그는 평균 6.9점 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삼성은 27승 27패로 5할 승률에 턱걸이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러나 1라운드에서 KCC에게 한 경기도 따내지 못하고 패했다. KCC는 이 때 우승을 차지했다. 딕슨은 지난 2010-2011 시즌을 끝으로 더는 국내 무대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사진_ K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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